나의 소녀시대, 그 녀석의 소년시대!

서울 여자, 도쿄 여자 #07

by 김경희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초등학생 시절, 저는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에 푹 빠져있었어요. 물론 ‘보물섬’ 말고도 아역배우 김다혜(이름이 맞는지 모르겠군요!^^)가 표지모델로 등장하는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책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보물섬’을 다른 것들과 대충 묶어서 기억하고 싶진 않아요. 제 기억에 만화잡지 중에 최고로 기억되는 보물섬,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보물섬’은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답니다. 당시 하교 후 시간이 남아도는 저는 다락방에서 뒹굴 거리다 ‘보물섬’을 베고 잠이 든 적이 많았어요. 어찌나 책이 두껍던지, 잠에서 깨어날 즈음엔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있을 정도였죠.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다른 어린이 잡지보다 엄청나게 두꺼운 보물섬은 제가 좋아하던 ‘아기공룡둘리’와 ‘달려라 하니’까지 연재되고 있었으니 이름 그대로 제게 보물 같은 존재였어요.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선생님과 그 노총각의 큰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려 보낸 고은애씨(후덕한 몸에 마음씨 고운)의 두근두근 로맨스는 지금도 잊히지가 않네요.


네 그래요. 작가님. 저는 소녀시절의 일정부분을 다락방에서 만화책과 함께 보낸 그런 아이였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만화책은 저를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데려다 주는 유일한 창구였으니까요. 좀 이상한 아이였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렇다고 친구를 사귀지 않는 외톨이는 아니었어요. 다만 친구들과 실컷 뛰어놀고 난 후에는 혼자 있고 싶어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겐 자기만의 방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방방마다 세를 들여 집주인이 쓸 방이 몇 개 없었다죠?)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다락방뿐이었죠. 맞습니다. 당시 저는 틈만 나면 다락방으로 올라가 보물섬이나 계몽사의 위인전집, 혹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오빠가 숨겨 놓은 선데이서울(?) 같은 잡지를 훔쳐보며 은밀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다락방에서 보물을 찾던 소녀! 소녀(小女)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나이 어린 여자아이라고 나오더군요. 그래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던 한 소녀의 시대는 그렇게 다락방에서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요. 너무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느끼는 건데 말이에요 작가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뭔가 거대한 사건보다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찰나적이고 소소하고 티끌처럼 작은 일들 말이에요. 말하자면 한밤중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삶은 달걀을 다섯 개씩이나 까먹던 장면이나 엄마가 계모임에 가는 날에만 얻어먹을 수 있었던 빵빠레(당시엔 최고급 아이스콘이었죠)를 아껴먹다 오빠에게 빼앗겼던, 그런 유치하고 우스운 기억 같은 것 말이에요. 언제나 소란스럽게 싸우고 험담하고 울고 웃던 시간들, 그래요 작가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자질구레한 일상에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소녀 시대는 이미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요즘 저는 또 다른 소년시대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제 아이의 친구들 이야기에요. 올해 12살이 된 초등학교 5학년의 소년들. 역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소년(少年)이란 아주 어리지도 않고 완전히 성숙하지도 않은 사내아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맞아요. 그 녀석들은 아주 어리지도 않지만 성숙하지도 않아서 매 순간이 서툼 그 자체에요. 그 서툴고 어리바리한 녀석들은(여자아이들에 비해 확실히 그래요) 그저 바라만 봐도 정말 재미있어요. 한번은 아이 친구들을 저희 집에서 재운 적이 있었어요. 이웃 간에 선을 지키는 일본에서도 친구 집에서 아이를 재우는 일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언뜻 듣기로는 일본에선 친구네 집에 놀러 보낼 때도 개인간식을 가져간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런가요? 아! 친구의 엄마가 해주는 떡볶이나 군만두를 먹어볼 수 없다는 건 좀 삭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그날 초대한 아이들의 저녁 메뉴는 제육덮밥이었어요. 이 녀석들의 음식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저는 꽤나 매운 제육덮밥을 대접했는데 아이들 모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정말 잘 먹더군요. 한 녀석은 먹는 속도가 많이 느렸고, 또 한 녀석은 양파만 골라서 남겼어요. 뭐 아무려면 어때요. 저는 편식이 그다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양파가 싫어도 나중에 충분히 좋아질 수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이들은 매운 덮밥을 후다닥 먹어치우곤 곧장 놀기를 시작했습니다. 체스를 하기도 하고 TV 모니터에 연결해 wii 스포츠 게임을 즐기다가는 엎드려 귀신 이야기를 한참동안 쏟아내더군요. 그러다 어울려 놀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엔 각자 저마다의 공간에서 자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무언가를 꼭 같이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신뢰가 쌓인 분위기. 소년A는 만화책을 보고 소년B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소년C는 홀로 과자를 아구아구 먹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고 보면 소녀와 소년은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팔짱을 끼고 서로의 귀에 우정과 비밀을 속삭이는 것이 소녀들이라면, 소년들은 그저 연결되어 존재하기만 하면 만사 OK가 되는 것.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아주 어리지도 않고 완전히 성숙하지도 않은, 그렇지만 다시 오지 않을 빛나는 한 순간에 놓여있는 깜찍하게 예쁜 녀석들인걸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작가님의 소녀 시대는 어땠는지!

소년들.JPG 동침 후 아침을 맞다, 그 녀석들의 소년시대!

서울 여자,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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