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서울 여자, 도쿄 여자 #12

by 김경희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오랫동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건 내 모습이 아니라 남들이 바라거나 혹은 내가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우기는 그런 사람이지, 진짜 내가 아니었어요. 그런 걸 알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나이란 마흔 살은 지나야 하는 걸까요? 지금 돌이켜 보면 삼십대에는 감정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치열하게, 그리고 전투적으로 살아온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고요?

고등학교 때는 모든 것이 다 불만이었어요. 공부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던 저는 학교의 그 폐쇄적이고 성적위주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시절도 정신없이 지나갔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학과에 진학을 했는지(물론 성적 때문이겠죠?^^;) 적성도 맞지 않는데다 모든 게 너무 복잡해서 따라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졸업이라는 걸 할 수 있었던 건 친구들 덕이었던 것 같아요. 남학생이 대부분인 저희 과 친구들은 종종 잔디밭에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시곤 했습니다. 안주라고 해봐야 새우과자 정도에요. 가끔 돈이 생긴 친구가 학교 앞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사준다면 그날은 기분 째지는 거죠.

가끔은 중국집에서 짬뽕에 소주를 먹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학생이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꽤나 새침데기 같아 보였는지 서울내기인 제가 술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남자 선배도 있었어요. 한번은 술에 거하게 취한 그 선배가 여러 학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묻더군요. ‘서울내기인 네가 소주에 김치찌개라고?’ 그 선배는 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를 서울에서 온 부잣집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치한 이야기입니까? 선배랍시고 훈계를 하던 그 남자 선배는 고작해야 이십대 중반, 저는 이십대 초반이었겠죠. 모두가 어렸던 거예요. 그리고 모두가 유치 뽕이었던 거죠.

아무려나 대학교 시절도 그렇게 시간만 까먹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랬듯이 취직을 했고 돈을 벌고 쓰는 것에 잠시나마 기쁨을 느꼈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러다 사춘기처럼 모든 게 정지된 듯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궁금했어요.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 있었지만 작가라는 건 어떻게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지금도 신기해요. 제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을까요? 핵심만 요약해 말하자면 저는 부단히 쓰기는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소설 따위의 글을 꾸준히 썼어요. 다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제가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삼십대가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 그 실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작가님. 신기하게도 서른 후반이 지나면서 그토록 알고 싶던 나의 정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하더군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가 말이에요. 얼마 전 꽤나 영리하고 어른스러운 후배 작가가 제게 물었어요. 서른 살이 되어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이죠. 너무 재밌는 건, 저는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 후배는 자기 세계가 있는 친구에요. 그래서 늦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점이 어렴풋이 보였어요. 이래서 어른들이 다 보인다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아, 그럼 저도 나이가 든 건가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 진짜 내 모습. 저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돈을 많이 벌거나 내 작품이 유명해지거나 그런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글을 쓰면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고(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지금 제가 바라는 삶이에요 작가님. 마흔 하나, 방황하던 고등학생에서 시간만 죽이던 대학생을 지나, 이제 무명작가이긴 하지만 어쨌든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고정된 일자리도 없고 집도 차도 없으며 수입도 불규칙하지만, 게다가 나이만 먹어가고 있긴 하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금 이 상태가 저는 참 좋습니다. 결국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건 나뿐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작가가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사실.

서울 여자,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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