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25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일본에서도 아이들 친구가 놀러와 잠을 자고 가냐고 물으셨죠? 네, 저희 딸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요. 어린이집 때부터 친구고, 집도 가깝습니다. 고토네라는 여자 아이인데, 저희 집에서 한 번 자고 간 적이 있고, 저희 아이도 그 집에 자러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두 주 전에 미리 약속을 해두었지요. 일본에서도 친구네 집에 자러 가는 일이 있어요. 단지 그런 일들이 즉흥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약속을 하고 벌어지는 일이 대부분이죠. 물론 조금더 친해지거나, 아이 엄마가 좀더 사교적일 경우엔, 약속을 하지 않고 놀러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약속을 해두는 게, 인간관계에서 신용을 쌓기가 쉬워지지요.
저희 옆집과 저희집과의 거리는 1미터도 안 됩니다. 50센티쯤 될까요? 창문을 열고 손을 뻗으면, 악수를 하고 남을 거리입니다. 반찬을 해서 창문으로 건네 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옆집은 저의 또래 아이 셋을 키우며 같은 초등학교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닙니다. 서로 더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리지요. 그래서 이사를 한 직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양쪽 집을 오가며, 토요일 점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라는 의미에서요. 그후 옆집 아내가 육아휴직 후 직장에 복귀하고, 제가 셋째를 가지면서 그 모임이 흐지부지해졌지만, 저희 남편은 이 상황을 '다행'이라고 축약했습니다.
다행이라고?!!!!
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요? 다행이라니??? 옆집과 간신히 친해졌는데 말이죠.
남편의 지론입니다. "계속 만나다가 혹시라도 서로 불쾌한 말이라도 오가면, 앞으로도 계속 옆집으로 지낼텐데, 불편하지 않겠어? 차라리 서로 좋은 관계에서 모임이 슬쩍 사라지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듣고 보니 남편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질투를 할 수도 있고, 논쟁이 오갈 수도 있고, 쓸데없는 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요. 저희는 집을 35년 론으로 구입했습니다. 옆집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적어도 25년은 서로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옆집입니다. 괜한 트러블을 만들어서 불편한 관계가 되면, 너무나 짜증이 날 거예요.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 아예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는 법. 이런 묘책도 있군요.
하지만,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네,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서로 미워할 이유도 없지요. 아니,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건 아니죠. 서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현관 앞에서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 일본인 남편 얘기는, 더러운 집안을 보여줘서 흠잡힐 사이는 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아이를 맡겨 당황스럽게 하지 않으며, 재밌는 얘기를 한다며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원하지 않는 조언을 하려는 일은 하지 말자는 거지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절한 관계. 저는 그런데 이 관계가 참 어렵고 가끔 답답하기도 합니다.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좀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유안진의 '지란지료를 꿈꾸며'를 중학교 시절에 정갈하게 베껴 쓴 연습장을 들고 다녔습니다. 일기장에서 적어 두었어요. 언젠가는 저녁을 먹고 난 후 허물없이 찾아갈 친구가 생기리라 믿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일본에 살면서 제가 그 시절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일본 주부들은 집 안이 아니라, 주로 공원에서 또는 집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에 앉아 더 편하게 얘기 할 수 있을 텐데, 그녀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제가 출산 후, 동네 친구가 찾아와 제 손에 선물을 쥐어주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에게 차를 내어 대접할 시간도, 출산의 고통을 이야기할 시간도 주지 않고요. 민폐를 끼치지 않는 일본인, 서로 거리를 두고 사는 일본인, 저는 이런 일본 사람들이 때로는 편해서 좋은데, 노후를 생각하면 솔직히 굉장히 외로운 느낌이 듭니다. 나이가 드는 서러움, 나이가 드는 고민은 어디에 풀어놓으면 좋을지. 혹시나 나이가 들어 가난해지고 몸도 약해지면, 그때 기대어 이야기 나눌 친구를 과연 일본땅에서 사귈 수 있을지. 한국에서도 사람 사귀는 재주가 없던 저에게, 일본땅의 허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습니다. 그런데 과연 저만 이렇게 느낄까요? 아마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저와 비슷한 느낌으로 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21세기 일본 도쿄에서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이 있고, 피씨방을 전전하는 젊은사람들이 있고, 직장을 잃고 취업을 못해 나이 든 후 성인물을 찍었다는 여성의 이야기가 뉴스가 되는 걸 보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과 인간과의 거리가 먼 일본은, 일본만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쿄여자 김민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