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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ug 28. 2016

아줌마의 비애 - 한국 편

서울 여자, 도쿄 여자 #20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일이 끊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일이 끊기면 어떨까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6개월 전부터입니다. 6개월 전에 3년 동안 고정적으로 하던 레귤러 프로그램을 그만 두게 되었거든요. 그 동안 잘나가는 방송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이 끊긴 적도 없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는 PD나 제작사 대표님이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묻곤 했어요. 김작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 있어? 그럴 때 마다 저는 머쓱해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능력이 없어서 한 가지 일도 벅차요, 라고 말이죠.      


네 그래요 작가님. 일에 대한 절박함 없이 삼십대를 보냈습니다. 가끔 친하게 지내는 작가 언니들과 농담처럼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어요. 마흔 다섯이 되기 전에 이 바닥을 떠나야지, 너무 오래 일하면 추한 것 같아. 라고 말이에요. 얼마나 철이 없는 이야기입니까? 굳이 제가 떠나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이 끊기는데 말이에요. 맞습니다. 지금 딱 그런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요. 일이 줄어들고 있는 게 피부에 와 닿을 정도니까요.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론가 메일을 보내고 있을 작가님을 떠올려 봅니다. 위로해 드리고 싶지만 저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대신 한 가지 들려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일명 ‘배 수확 프로젝트’를 함께 한 저희 동네 아줌마들 이야기입니다. 궁금하세요?     


한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알고 지낸 몇몇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낸 후 그녀들과 저는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도 마시고 각자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사귐. 네 그래요 작가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엄마가 된 철없는 엄마들이 다시 누군가를 사귀기 시작하는 겁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사회생활을 접은 젊은 엄마들은 마치 누군가를 처음 사귈 때처럼 에너지가 넘치게 되죠. 여름이면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었습니다. 가을에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 사이 근사한 카페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죠. 그때 알게 되어 7년 째 가까이 지내는 몇 명의 아줌마들이 있는데 그녀들의 이력은 이렇습니다.     


먼저 J아줌마. 그녀는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아이 세 명을 연달아 낳는 바람에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리고 K아줌마. 그녀는 동네 놀이터에 나올 때조차 프랑스 여인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등장하는 여성입니다. 그녀의 전공은 건축이라고 해요. 결혼 전까지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했지만 일을 손에 놓은 지금은 스마트폰 게임인 가상 집짓기 놀이에 빠져 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Y아줌마. 그녀는 학창시절 핸드볼 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습니다.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항상 운동복차림이죠. 언젠가 아이들 축구대회에서 엄마들의 경기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무서운 속도로 달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네 그래요 작가님. 우리는 모두 한때, 꽤나 가능성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의 인생에서 커리어를 쌓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삼십대를 우리는 육아와 집안 일로 보내며 이제 사십대를 맞았습니다. 물론 집안 일이 적성에 맞는다면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문제는 우리가 집안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죠. 지금도 가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어떤 일이든 10년 이상 하면 도가 터야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밥하고 반찬하고 청소하는 일을 10년 이상 했는데 어떻게 일이 늘지 않고 반찬도 점점 맛이 없어지냐고 말이죠. 둘 중 하나일겁니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재능이 없거나. 하지만 우리는 분명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나마 저는 글이라도 써서 밥벌이를 하지만 그녀들의 재능은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 걸까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녀들이 잃어버린 직업, 재능, 꿈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생각 말이에요. 하지만 작가님의 말대로 아줌마들을 기다리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젊고 유능한 친구들도 일자리가 없는 데 하물며 10년 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아줌마들에게 과연 좋은 일자리가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줌마의 비애, 한국의 현실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늘어져 있을 그녀들이 아니었어요. 몇 년 전부터 그녀들은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거든요.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된 일은 일명 ‘배 수확 프로젝트’ 입니다. 저희 동네는 서울 변두리도 아닌 경기도 외곽이라 산이나 농장이 가까이 있는 시골스러운 동네입니다. 그런데 배 농장에서 힘 좋은(?) 아줌마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거죠. 일의 기간은 딱 2주 하루에 3시간 정도, 매일 커피나 마시며 시간을 때우느니 한철 바짝 일하면 남편 모르게 수십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들이 농장 일을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어요. 그럼에도 그녀들은 용감하게도 일을 하기로 합니다. 모닝커피 타임도 하루 이틀이죠. 아마 일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일의 즐거움과 기쁨을 다시 느껴볼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 되었든 중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J아줌마는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배를 수확하는 일은 그래도 땅을 보고 자연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나는 무조건 한번 해볼 거야, 자기도 같이 하자! 라고 말이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름다움 말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녀들은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배를 수확하는 일이면 어떻습니까? 남을 밟고 오르는 일도 아니고, 땅을 밟는 일인데 말이에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핸드볼 선수 출신인 Y아줌마는 일도 그렇게 공격적으로 잘할 수 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아마도 수비수가 아니라 공격수였던 모양입니다. 항상 프랑스 여인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닌 K아줌마는 배 농장에 나오는 2주간도 우아한 모자를 착용하고 나왔다고 해요. 한 손에는 차갑게 식힌 아메리카노가 담긴 글라스보틀을 들고 말이죠. 한번 상상해보세요. 프랑스 여인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배를 따는 그녀의 모습을!     


영문학을 전공한 J아줌마는 이 모든 과정을 눈과 귀에 담아와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배를 수확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한 자신에 대해 반성도 했답니다. 게다가 오전 작업이 끝나면 새참 타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노동 후에 먹는 그 밥은 꿀맛이었을 거예요. 우리 같은 아줌마들은 내가 한 밥이 아니고 남이 차려주는 건 뭐든 맛있으니 말이죠. 배 농장 일이 끝난 후 K아줌마가 저를 불러내 이렇게 말했어요. 오늘은 내가 커피 쏠 거야, 지갑 열지 마!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해요. 지갑을 활짝 열어 보이며 커피 값을 계산 할 때 그녀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저는 사십대가 아주 좋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 배 수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그녀들이 살짝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그녀들은 어떻게 지내냐고요? 부단히 노력한 끝에 K아줌마는 작은 건축사무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물론 급여도 적고 다른 직원들의 보조업무 정도이지만 그녀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어요. 영문학을 전공한 J아줌마는 사실 외모가 출중하고 언변이 좋아요. 그래서 운 좋게도 EBS라디오 ‘엄마가 간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주부리포터로 활동하기도 했죠. 물론 고정적인 일자리는 아니지만 자신감을 얻기 위한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핸드볼 선수 출신인 Y아줌마는 지금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배 수확 프로젝트를 함께 한 그녀들 모두 지금, 활기차게 사십 대를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인거죠. 네 그래요 작가님. 궁지에 몰렸을 때 살아나오는 길은 지금 하는 일을 묵묵히 줄기차게 하는 것이 맞다, 그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아직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지만 저도 곧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겠죠. 마흔이라는 나이는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길을 찾아가는 나이인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한때 건축가를 꿈꾸고, 핸드볼 선수를 꿈꾸던 그녀들은 이제 사십대의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꼭 비애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닐까요. 지금 한국 날씨가 딱 그렇습니다. 여름밤에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가을이더군요. 이제 정말, 가을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침, 배를 수확할 때!     


서울 여자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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