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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Aug 26. 2016

아줌마의 비애

서울여자 도쿄여자 #35

아침부터 여덟개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중 일곱은, "당신은 엄정한 심사 결과, 서류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다른 곳에서 활약하시길 빕니다."라는 메일입니다. 그 회사들 중에는 한국에서 유명한 모 회사의 사내 통번역도 있고 게임 회사의 한국어 번역담당자, 일본회사의 한국 영업 담당자 등이 들어있습니다.


네, 저는 지금 취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흔의 애 셋 있는 아줌마에게 문은 잘 열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래 봬도, 통번역의 프로페셔널입니다. 대학시절에는 일본 미쓰비시사가 제공하는 아시아 홈페이지 프로젝트의 한국어 제작 과정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각종 전시회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는 기자로 다양한 인물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인터뷰 하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글을 썼으며, 모 방송사의 한국어 통번역을 맡아, 동시통역과 자막 번역 등을 해왔습니다. 근 20년을 통번역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직장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네, 한국어 자체는 아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일곱개의 서류심사 불합격 통지를 받으니, 마음이 좋을 리가 없지요. 한숨이 절고 나옵니다. 인맥도 없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겨진 길은, 편의점의 아르바이트나 음식점 서빙 아르바이트겠지요. 삶이 이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매번 겪으면서 알게 됩니다.


한국 신문에선 일본 회사들이 한국의 인재를 구한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인재가 아닌가 봅니다. 일본의 회사들이 원하는 한국의 인재는 신졸자에 한정되어 있고, 저는 마흔이 된, 이미 일을 15년은 해온 사람입니다. 저처럼 애매한 경력이 있는데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은 일을 시키기가 불편하다며, 모두가 꺼립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요? 제가 원고를 쓰거나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강의를 해서 버는 돈으로는 죽만 먹고 살아야할 판입니다.


저의 청춘은 1996년이었습니다. 저는 만으로 스무살이었고, 대학교 1학년이었으며,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다행히 그도 저를 좋아해서 캠퍼스 커플로 손을 잡고 학교에서 하는 축제에 참석했고 같이 불꽃놀이를 보았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에 테니스 선수였고, 누나가 셋이나 있어서, 여자를 잘 다뤘으며, 누구에게나 친철하고 착실한, 우리 학부의 일명 '킹카(사어인가요?)'였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고 말했습니다. "나 너 좋아해."라고요.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저는 늘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고, 맴돌면서 귀찮게 굴기 보다는 속 시원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요. 여하튼,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는 그와 '사귀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저는 '누구누구의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학부의 유명인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를 노리는 여학생은 많았지만, 저처럼 쉽게 고백을 한 학생은 없었고, 그래서 저는 부러움과 시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질투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저 손잡고 불꽃놀이를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으며, 그날의 추억은 앞으로도 여러번 제 인생에서 힘겨울 때마다 떠올리게 되겠지요. 


헤어지던 날, 그는 공인회계사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연애를 하면 공인회계사가 어려울 것 같다고 그는 어렵게 말했습니다. 장문의 편지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연애를 해서 공인회계사가 될 수도 있고, 연애를 안 해서 공인회계사가 될 수도 있고, 어느쪽도 아닐 수도 있겠죠.


그 시절이 가장 반짝이던 청춘이었습니다. 일본에선 아무로 나미에의 까만 피부가 유행을 해서, 누구나가 피부를 까맣게 태우고 다녔고, 아무로 나미에가 결혼식을 발표할 때 입었던 버버리의 체크 스커트가 유행을 했으며, 고무로 테츠야(음악프로슈서)가 만든 전자음이 가득 들어간 고음 보이스가 울리는 노래들이 길거리를 휘어잡았던 시절입니다. 수많은 여자 가수들을 울렸던 고무로 테츠야는 결혼을 했고, 제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가수자 고무로 테츠야의 연인이었던 가하라 도모미는 헤어진 슬픔을 극복하고, 요즘도 가수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젊은날의 연인은 공인회계사가 되어, 오사카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저와 헤어지고 꿈을 이뤘습니다. 저는 기사를 쓰고 번역을 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때는 회사에 소속된 회사원으로 조금 더 수월하게 일하고 돈을 받았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된 안정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제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합니다. 비정규직 강사 자리가 하나 비어서, 가을부터는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안은 꼬리를 물고 따라옵니다. 일본에서도 여성이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가, 제 자리를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정규직일 경우에만 출산휴직, 육아휴직(1년), 어린이집 혜택까지 다양한 제도적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덟개의 메일 중 마지막 하나의 메일은, 원고 독촉 메일입니다. "이제 원고를 좀 모으셨습니까?" 일본 출판사 편집 담당자의 메일에 가슴이 철렁 합니다. 네 저는 그 편집자와 벌써 1년전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취업을 하고픈 저의 현실과 욕망도 있지만, 저의 가장 큰 현실이자 욕망은 원고를 쓰는 일입니다. 마흔 아줌마의 현실.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이란 현실을 우선은 제쳐 두고 제가 가장 하고픈 글 쓰는 일을 저의 현실로 완전히 받아들여보렵니다. 10년 후에 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어요. 


오늘 황현산 선생님은 트윗에 "궁지에 들었을 때 살아나오는 길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줄기차게 하는 것이다"란 명문을 남기셨습니다. 죽만 먹고 살아도 당분간 남편을 의지해, 글만 써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을 보시고, 일을 주시는 분이나 회사가 있으면, 얼른 쫓아가겠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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