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지연 사건 : 내가 첫날부터 지각할리 없어!
사랑하는 친구들이 써준 작별(?)편지들을 읽으며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해 가장 큰 오열을 했다. 편지를 한 장씩 읽을 때마다 눈물을 한 바가지씩 흘렸다. 그렇게 한 열 바가지쯤 눈물을 흘리다 보니 어느새 퉁퉁 부은 눈으로 도쿄에 도착해 있었다. 아, 부은 게 아니라 원래 내 눈인 건가..?
아무튼 그때는 한창 코로나 시국이어서 해외에서 입국한 나는 격리를 해야 했지만 앞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 주말밖에 못 쉰다고 생각하니 격리 기간이 그토록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일본 취업 준비로 오타쿠의 본분을 소홀히 했던 터라 격리 기간 동안에는 그동안의 밀린 만화와 애니들을 챙겨보며 못다 한 본분을 다했다. 일할 때는 죽어라 안 가는 시간이 놀 때는 다른 행성인가 싶을 정도로 어찌나 잘 가던지 그렇게 격리 기간이 순식간에 끝나고 드디어 내 인생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사 첫날부터 일본 전철은 자주 지연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도 첫날만큼은 정말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일본의 전철은 한국의 지하철처럼 안전문이 잘 되어있지 않고 있어도 한국 지하철 안전문의 반 정도 크기라 사람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또 대부분의 전철이 지상에서 운행되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인명사고나 날씨 또 그 밖의 여러 이유들로 인해 지연이 정말 정말 자주 된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출근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모닝커피 한 잔을 사들고 멋지게 출근하는 거였는데 전철이 지연된 탓에 모닝커피는 무슨 지각이라도 안 하면 정말 다행이었다. 이럴 때 보면 인생은 참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다. 평화로울 때쯤 이렇게 변주를 주다니 고마운 건가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겪었으면서 또 방심하는 나도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어라 달려 다행히 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찌저찌 무사히 출근 후 첫날은 자기소개와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드립니다.)를 무한 도르마무 하다가 끝이 났다.
이제 와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일본 전철은 지연이 자주 되는 것만 빼면 장점도 있다. 전철이 지상에서 달리기 때문에 바깥 풍경이 잘 보여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창밖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겨울이 되면 보일러를 튼 것처럼 의자가 뜨끈해져서 얼었던 몸이 스르륵 녹아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이다. 역시 뭐든 다 장단점이 있는 건가. 다행히도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겨줘서 다음날부터는 전철 지연을 대비해 출근 루트를 플랜 A, B, C로 세워놓는 치밀함도 기를 수 있었다.
삶의 대부분의 위기는 당장 맞닥뜨렸을 때는 너무 힘들고 버거워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되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추억이 되어있기도 한다. 물론 추억할 수 없을 정도의 힘든 위기들도 분명 있겠지만 그 또한 경험이 되어 나의 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고 장담한다. ‘전철 지연 사건‘ 을 되돌아보니 지금은 그때가 마냥 청춘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난 청춘이다.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한국에서는 지하철이 지연되는 일은 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자주 지연되는 일본 전철의 운영 구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 직접 살아보고 나니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그들은 그들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철이라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분에서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입사 첫날을 시작으로 배움의 축복이 끝이 없었던,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나의 일본 생활 에피소드들을 하나 둘 풀어내며 옅어져 가고 있는 그때의 배움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