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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나 Jan 31. 2019

모두에게 초당 순두부의 위로가 있기를

강원 강릉 초당마을에 가다


취직을 준비하던 시절의 일이다. 이맘때 겨울,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입맛은 없었다. 탈락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지하식당에 있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 앉았다. 순두부백반을 주문했다. 뚝배기에 달걀을 톡 까고 보글보글 끓여낸 얼큰한 순두부찌개로 속을 달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식탁에 오른 것은 고춧가루도, 다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은 뽀얀 순두부, 그 자체였다. '초당두부'와 첫 만남이었다.


양떼구름처럼 몽클몽클한 초두부가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로부터 수년후 ‘초당두부’로 유명한 강원 강릉 초당마을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순두부를 ‘초두부’라고 한다. 두부가 완전히 응고되기 전에 꺼낸 ‘첫 두부’라서 처음 ‘초(初)’자가 앞에 붙었단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가게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양떼구름처럼 몽클몽클한 초두부가 그릇에 담겨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양새가 먹음직스럽다. 간장을 쳐서 먹으려는데 주인장이 날것으로 먹어보란다. ‘밍밍할 것 같은데’ 하는 의심 속에 한술을 떴다.



어라?



물 한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또 한술. 첫맛은 고소한데, 뒷맛은 달달하다. 씹을 새도 없이 촉촉하게 녹아내리는 식감은 또 어떻고.


‘초당두부’로 유명한 강원 강릉 초당마을.


“초당두부 맛에는 동해의 깨끗한 바닷물이 한몫하지요. 화학공정을 거친 간수 대신 바닷물을 응고제로 쓰거든요. 두부에 소금이나 설탕을 따로 넣지는 않아요. 콩물과 바닷물을 5대 1의 비율로 섞어 간을 합니다.”


가업을 이어받아 10년째 두부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장의 설명이다.



이 마을엔 두부 음식점 20여곳이 있다. 대부분은 두부를 직접 만든다. 그래서 새벽녘 초당마을에 가면 집집마다 가마솥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 지역의 두부 제조업체인 ‘강릉초당두부’ 공장에서 정화시설을 거친 바닷물을 얻어다가 쓴다.


초당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과 생가터가 있다.



초당두부의 역사는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시인 허난설헌과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1517~1580년)이 그 주인공이다. 허엽이 강릉 부사로 있을 때 바닷물로 직접 두부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좋았단다. 이것이 초당두부의 시초가 됐다는 설이다. 마을과 두부 이름에 ‘초당’이 붙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초당마을 사람들이 지금처럼 두부를 활발하게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50년대 이후다.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 지역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제자를 배출했는데 해방 이후 제자들이 우익단체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찍혀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얘기다. 1946년 일어난 ‘초당리 7·24’ 사건이다. 여기에 1950년 한국전쟁이 잇달아 터지면서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편을 잃고 살길이 막막해진 아낙네들은 두부를 만들어 강릉 시장에 팔기 시작했다. 이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오늘날의 명성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흔히들 나약해 보이는 사람을 두고 ‘바늘뼈에 두부살’이라고 말한다. 하얀 도화지 같은 두부는 다른 재료나 양념에 의해 길들여지길 기다리는 부재료인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400년 동안 이어진 초당두부의 굴곡진 역사를 보건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한 생존력이 두부와 어울린다.


초두부를 비울 때쯤 두부전골이 보글보글 끓는다. 매끈한 모두부가 ‘찰박, 찰박’ 소리를 내며 그릇에 부딪는다. 유혹에 못 이겨 한점 집는다. 뜨뜻한 국물이 밴 덕분에 얼었던 몸에 훈기가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초당두부 본연의 고소한 맛을 즐기려면 초두부나 모두부를 양념 없이 날것으로 먹어야 한단다.


“사실 지금이 두부 맛이 좋지 않을 때예요. 묵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기 때문이죠. 해콩이 나올 무렵에 먹는 초당두부가 진짜예요. 국산콩으로 만든 두부, 아침에 갓 만든 신선한 두부 맛이 좋지요.”




여의도 지하식당에서 만난 초두부 얘기로 돌아가자.


당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접 결과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ㅠㅠ). 하지만 녀석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청승맞은 기억은 있다. 맛도 밍밍하고 모양도 변변찮은 것이, 화려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지금은 그 답을 어렴풋하게나마 구했다. 400년 동안 제맛을 꾸준히 지켜왔기 때문에 너와 내가 만날 수 있음을.


초당두부의 매력은 색안경을 껴서는 볼 수 없고, 조미료를 쳐서는 느낄 수 없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세상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을 것 같아 고독한 모두에게, 초당두부의 위로가 있기를.



참고자료=디지털강릉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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