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1920년대를 풍미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 그간 억눌려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조선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조선인들의 움직임은 만주까지 확산되었으며 동아시아의 역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3.1 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조선을 강압적인 방식만으로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무단통치' 노선을 폐기하고 '문화통치' 노선을 채택했다. 3.1 운동이라는 민족적 참화이자 열망의 분출로 1920년대를 맞이한 조선에서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노선들이 검토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무장투쟁노선과 실력양성운동이라는 큰 줄기로 구분되는 노선들이다.
이중 실력양성운동은 민중이 스스로 힘을 길러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해당 노선에 따라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이 맹렬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실력양성운동 중 하나가 바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이다. 1920년 6월 23일, 이상재 등이 ‘조선교육회’를 출범시키며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학교 설립을 통해 조선인 교육을 주도하고자 했다. 일제가 '내선 공학'을 내세운 국립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 타이완제국대학 등, 일본 제국주의 엘리트 양성기관의 식민지 설립을 추진했다. 1922년 11월, 조선교육회를 주도하던 이상재 등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했다.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 출범식 이들은 "조선민족 한 사람 당 1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1천만 원의 설립기금 모금을 결의했다. 민립대학기성준비회의 조직이 확대되자 일제는 이들에 대한 탄압을 진행했고, 조선제국대학창설위원회를 구성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제의 억압도 주요한 요인임이 분명했으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지닌 자체적인 한계 역시 이 운동을 난관에 부딪히게 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통교육도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자체에 대한 반발도 분명히 존재했다. 모금액은 100만 원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1923년의 기록적인 수해와 가뭄까지 맞물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민족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열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남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자, 해방과 새로운 국가의 건국 사이에서 다시금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역사에 등장한다. 1946년 9월, 광주에서 태동한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는 새로운 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 사회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 아래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이들은 곧 유래 없는 대중 참여를 이끌어냈다. 무려 7만 2,195명이 조선대학교 설립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광주 지역 인구가 10만 명에 불과했음을 생각할 때 광주와 호남을 넘어 전 민중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7만 2천 명이라는 압도적인 대중 참여를 기반으로 한 대학설립은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200여 개 대학교의 설립 배경을 모두 살펴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뜻깊은 일이었다.
조선대학교는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다수 대중의 지지와 성원을 바탕으로, 민중적인 기반 위에서 민립대학으로 역사에 태동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다양한 사회 행위를 하는 크라우드 펀딩의 방식으로 종합대학을 건립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금자탑을 새긴 셈이다. 그러나 조선대학교의 위대한 설립정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가 72,195명의 시민들로부터 모금받은 현물이 상당한 양이었는데, 당시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던 서민호는 전남도청 운수과장을 맡고 있던 박철웅에게 현물 처리를 요청했다. 박철웅은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그는 현물 처리를 주도했고 조선대학교를 대학교육기관으로 출범시킨다. 해방된 조선에서 대학설립을 주도한 김성수, 김활란 등이 대부분 친일전력을 가진 인물들인 점을 생각할 때, 이 역시 상당한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대학교를 출범시킨 박철웅은 설립동지회 중심인물들을 배제하고 조선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는 박철웅에 의해 철저히 사유화되기 시작한다. 민중이 설립한 민립대학이 사립대학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6.25 전쟁을 거치며 설립동지회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박철웅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1980년대까지 조선대학교 사유화한다.
이 땅의 역사가 그러했듯, 1980년까지의 조선대학교도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횡을 일삼던 박철웅을 잠시나마 물러나게 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의 신군부였다. 신군부는 광주보안대로 박철웅을 압송하여 학교 운영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했다. 그는 1982년 11월에야 복귀했다. 박철웅은 전두환 군부에 의해 고초를 겪었지만, 학교로 돌아온 이후에는 체제수호를 위해 노력했다. 박철웅은 반정부 투쟁에 참여하는 학교 구성원들의 행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모든 교수들을 매일 아침 운동장에 불러 모아 출석을 부른 후 아침 구보를 시키고 훈시를 하는 등 독단적인 대학운영을 지속했다. 그 역시 반란을 일으킨 군부가 사회 전역에 이식한 '군대문화'의 수호자였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 10권에서 군부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박철웅을 동명의 시 '박철웅'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철웅>
해방 직후 이 고장 사람들이
쌀 한 되
보리 한 되 내놓아
그야말로 향토의 민립대학으로 문을 열어
젊은 이돈명이 제1회 졸업생이었던가
그러다가 조선대학교는
총장도
이사장도 박철웅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대학교는
박철웅의 나라였습니다 하오리 입었던 야망의 나라였습니다
전체 교수 다 운동장에 모여라
체력단련이다 체력이 약하면 정신력이 약하다
한 바퀴 돌아라
두 바퀴 돌아라
아닌 밤중에 육군 신병훈련소였습니다
어느덧 그 조선대학교도 지나쳐
답답한 김포공항에 내리는 시각입니다
이렇듯 박철웅 개인의 독단적인 학교 운영은 당대의 한국사회가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이에 군부에 대한 반발로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하여 한국사회에 민주화가 요구되었듯, 조선대학교 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1987년 8월 5일 박철웅의 비서가 조선대병원장을 공식석상에서 폭행한 사건이 단초가 되었다. 학생들은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으며 9월 17일부터 농성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농성은 시민들과 학부모들의 가세로 장기화되었고 1988년 1월 8일까지 113일간 이어졌다.
당시 반독재투쟁과 맞물려 전개되었던 조선대학교 점거농성은 1988년 1월 8일 새벽 4시에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러나 문교부는 조선대학교에 대한 종합감사를 실시하여 박철웅 총장과 기존의 이사진들을 해임하였고 위의 시에도 잠시 언급되는 이돈명이 1988년 9월 29일 조선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학내 민주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민립대학으로 설립되어 사립화의 전횡을 겪었던 조선대학교가 다시금 시민의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2007년 1.8 항쟁은 조선대학교 공식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박철웅 파벌에 해당하는 ‘구 재단’ 측이 행사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민립대학 정신 계승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2010년, 광주시장 선거에 출마한 진보신당 윤난실 후보는 “조선대학교를 시립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구재단 측 인사들은 즉시 반발했다. 조선대학교 동창회의 조환종 회장, 오병인 이사장, 김명현 사무국장 등의 회원들은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대학교는 1946년 고 박철웅의 교육철학과 건학정신을 내걸고 개교한 대학”이라고 주장한 후, “설립재단의 공적을 제쳐 놓고 시립 대학화를 공언한 것은 조선대학교 전 구성원을 모독하고 선량한 시민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발표했다. 이들은 시장 후보 선본에 난입하여 “조선대학교 설립 역사를 모르는 무식한 진보신당은 해산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72,195명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대학교를 사유화하려는 '무식한' 토호세력이야 말로, 진정 해산해야 한다.
이렇듯 조선대학교는 형식적인 학내 민주화는 달성했지만, ‘구재단’으로 불리는 토호세력의 영향력으로 인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대학교는 시민들의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최초의 민립대학인 만큼, 최소한 설립정신에 걸맞은 공영형 사립대학으로 거듭나는 게 바람직하다.
(본 글은 2018년 10월 2일 정의당 광주광역시당에서 실시한 '조선대학교 공영형사립대학 발전 토론회'에서 제가 발제한 '조선대학교의 역사' 발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