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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ul 03. 2020

[들불7열사] ④ 박관현, 5.18 전남대 총학생회장

1980년 5월, 그때 그 사람들

박관현


(1953년 6월 10일 ~ 1982년 10월 12일)


1. 세상에 눈을 뜬 사법고시 준비생


 박관현은 1953년 6월 10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장기 하사로 군 복무를 했기 때문에 한동안 논산에서 지냈다. 광주로 돌아온 그는 수창초등학교, 광주 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광주고등학교에는 양강섭, 장석웅, 신계륜 등이 있었다. 박관현은 이들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양강섭, 장석웅과는 훗날 전남대에서 재회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신계륜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다. 박관현은 특히 양강섭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반 소속이었으나 각자의 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었다. 이 시기, 관현의 꿈은 법대에 진학하여 판사가 되는 것이었다.


 1973년, 박관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나 법대 진학에 실패,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입영 영장이 발부되어 군에 입대했고, 3년간 군 복무를 하고 제대한다. 1978년, 박관현은 마침내 전남대학교 법학과에 차석으로 입학, 꿈에 그리던 법대생이 된다. 당시 전남대에는 학생운동이 움트고 있었다. 관현은 전남대에서 고등학교 동창이던 양강섭, 장석웅과 재회했고, 사회과학 관련 공부모임에도 참여했다. 장석웅은 그에게 당대 전남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윤한봉과 김상윤을 소개해 주었다.


 1978년 12월, 광주에서 노동자 교육운동을 주도하던 들불야학이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기획했다. 윤상원, 김영철 등 들불야학 강학들이 광주 유일의 공단이던 광천동 광주공단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조사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이들은 즉시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 조직에 착수했다. 들불야학 1기 강학 신영일이 같은 국사교육과에 다니던 장석웅을 설득했다. 장석웅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박관현에게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전대학보사 안진 기자는 아예 학보사를 그만두고 왔다. 이들은 의기투합했고, 두 달간 광주공단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헌신적인 조사를 했다. 결국 299장의 설문지가 회수되었고, 걸출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실태조사반 구성원들은 조사를 진행하며 여러 차례 합숙, 철야 작업 등을 진행,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박관현은 공단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마주하며 그동안 믿어왔던 법관의 길에 회의감을 느꼈다. 어두운 시대였다.


2. 들불야학에 합류하다


 1979년 3월, '실태조사반' 활동을 했던 장석웅, 박관현, 안진, 신영일 등이 개학과 동시에 사회과학 서클 '사회조사연구회'를 결성했다.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박관현은 서클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며칠 후,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이 박관현을 찾아왔다. 상원은 관현에게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박관현은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다.


 1979년 5월 3일, 전남대학보(현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남대학보는 5차례에 걸쳐 실태조사 결과를 보도할 예정이었다. 5월 10일에는 두 번째 편이 보도되었다. 사상 첫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는 지역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남대학보의 보도를 접한 전남일보 측도 관련 소식을 주의 깊게 다뤘다. 그러나 이 소식은 즉시 중앙정보부에 전달되었고, 그들의 압력으로 나머지 3차례의 보도는 무산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그 일부 내용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광주공단 전체 노동자의 50% 이상이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전체 노동자의 22%가 주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했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63개 업체 중 3개 업체에 불과했다. 사법고시에 응시할 생각이었던 박관현은 이 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고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에 합류했다.


3.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다


 1979년 10월 26일, 18년에 걸쳐 이어진 기나긴 겨울이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독재 체제 그 자체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것이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들의 야욕을 실현시킬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수많은 시민들은 민주화와 자유의 '봄'이 올 거라 여겼다. 시민들이 스스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표현, 사상, 양심, 출판, 결사를 비롯한 모든 기본적 영역에서의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남대학교에서도 복적생들을 중심으로 독재에 협력한 '어용교수 퇴진'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 학기 시작 직후인 3월 27일에는 어용교수 백서가 발표되었다.


 1980년 3월 31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선거 시행세칙 제정 및 중앙선거관리위원 선출을 마쳤다. 한편, 박관현은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결국 박관현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부활에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했고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양강섭을 만나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양강섭은 7월까지만 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이를 수락했다. 부총학생회장으로는 공과대학의 이승룡을 설득했다. 인문대학 정선자 후보 등 단과대학 러닝메이트도 생겨났고, 들불야학을 비롯한 사회운동 그룹에 속해있던 전남대 재학생들도 속속 선본에 합류했다.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402호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방이 선거캠프로 변모했다. 선본명은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였다. 박관현은 헝클어진 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윤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해주었다. 신뢰감을 주기 위해 양복도 빌려주었다. 1980년 4월 9일, 박관현은 6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 문교부에 의해 문을 닫았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부활하게 되었다.


4.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하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결성 직후부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곧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1980년 5월 14일, 전남대 총학생회를 필두로 한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정문을 넘어 거리로 진출,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양심적 교수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이날 전남도청까지 행진다. 일명 '민족민주화성회'였다. 학생들의 평화적인 행진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했다. 전남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광주 지역 청년들은 다음날인 5월 15일에도 행진을 진행했다. 1980년 봄, 각 대학에 총학생회가 재건되었듯 각 공단에서도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있었는데, 로케트건전지 노동조합을 결성한 광주 지역 여성노동자 1,800명은 이날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개최한 후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서 빵과 우유를 전달했다. 이날 집회의 사회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양강섭 총무부장이 맡았다. 그의 소개를 받고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수많은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는 이 나라에! 인간 노릇을 못하고 노예와 같이 굴종 거리며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 이제는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최선을 그르칠 수 없어서 다 같이 동참하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의 연설은 여전히 많은 광주 시민들에게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다. 1980년 5월 15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시위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직후, 서울 지역 학생회들이 시위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서울역 회군'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광주 지역 학생들은 이대로 시위를 끝낼 수 없었다. 이들은 고심 끝에 5월 16일에도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 형식 역시 지난 이틀간 있었던 가두시위보다 더 파격적인 '야간 횃불집회'로 결정,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기로 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는 당시 전라남도 경찰의 총책임자였던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을 만나 야간 횃불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1980년 5월 16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횃불시위를 진행했다. 광주 경찰들이 이들을 보호했다. 불과 이틀 후부터 광주가 겪게 될 참극을 상상하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5.16 화형식'을 진행했다. 마지막 집회가 횃불집회로 진행된 것은, 밤하늘을 밝히는 횃불과 같이 명명백백하게 나아갈 길을 밝히자는 의미였다. 이날 횃불집회를 끝으로 3일간의 민족민주화성회는 막을 내렸다.


5. 신군부의 반란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서울역 회군을 기점으로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군부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군부는 5월 17일을 기점으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국 각지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휴전선의 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그들의 군대는 대학가와 시민들의 공간들로 향했다. 군부는 가장 먼저 이화여대에 모여있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 대표단 회의장에 난입했다. 이 자리에서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체포 직전까지 빠르게 전국 각지에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 전남대 총학생회에도 "어서 피하라"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군부의 움직임을 전달받은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즉시 광주 계림동 대지호텔로 몸을 피했다. 이미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1시경, 박관현은 총학생회실에 남은 인원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양강섭 총무부장을 전남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양강섭이 총학생회실로 가서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 33대대였다. 총학생회실에 남아있던 인원들은 서둘러 두 갈래 길로 피신을 시도했다. 양강섭 총무부장 등 3명은 중앙도서관을 거쳐 상과대학 쪽으로 피신했다. 이승룡 부총학생회장, 권창수, 오진수 등 4명은 공대 쪽문을 거쳐 피신하고자 했으나, 퇴로가 막혀 공대 5호관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3시,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전남대에 왔다. 군인들은 이미 학교를 점령하고 도서관 등에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끌어내 기합을 주고 있었다. 이들은 학생들을 마구 폭행하고 체포했다. 박관현이 정문에 이르자, 학교 수위가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결국 남은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수 돌산도까지 피신했다. 불과 몇 시간 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사회운동의 역량을 보존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6. 감옥에서 맞이한 최후


 1980년 5월 18일, 박관현과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떠나간 광주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광주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고 10일간에 걸쳐 위대한 저항으로서 항쟁을 완성한 것이다. 박관현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박용준과 윤상원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중에 장렬하게 산화했다.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들은 박관현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당국에게 체포될 수는 없었다. 수사당국은 이미 그가 체포될 경우에 대비, 시나리오를 작성해둔 상황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사당국에 따르면 박관현은 김상윤과 정동년이 김대중에게 받은 돈을 전달받아 총학생회 선거를 치르고 5.18을 준비한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결국 박관현은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6월 초순 경에는 서울로 도피처를 옮겼고, 1981년 9월까지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 위치한 이모집 다락방에 숨어 살았다.


 1981년 9월, 박관현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화랑섬유'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그는 1982년 4월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4월 5일, 관현이 공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TV에 광주항쟁 수배자의 면면과 현상금이 보도되었다. 그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이날, 관현의 얼굴을 알아본 동료 노동자 최행락과 이순분이 경찰서를 찾아갔다. 잠시 후, 공장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박관현은 순순히 본인의 정체를 인정했다. 박관현은 광주교도소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신영일, 임낙평과 재회했다.


 1982년 5월 4일, 박관현은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령 위반 등 내란주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구형받았다. 그는 그해 8월 말부터 부림, 학림 사건 관련자들의 고문 피해에 항의하며 '교도소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1980년 9월 7일, 박관현은 10여 일간 단식을 이어가던 와중에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굴하지 않고 교도소 처우 개선과 5.18 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을 이어갔다. 1982년 10월 10일, 단식을 이어가던 박관현은 가슴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그는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0월 12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광주 전역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이 전남대 병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란 당국은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시신을 탈취, 강제로 부검을 실시한 후 고향인 영광으로 보냈다. 박관현은 5년 후인 1987년에야 망월동 묘역에 묻힐 수 있었다. 훗날, 그의 정신을 기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을 지금도 '관현로'라고 부르고 있다. 



<들불7열사>


 엄혹했던 1970년대 후반. 광주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들불야학'이 있었다. 1980년, '들불야학'은 5·18 민중항쟁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렸고, 강학으로 활동했던 이들 7명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이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2002년, 살아남은 사람들이 들불야학 일곱 열사를 기리는 영구 불망(永久不忘)의 기념비를 광주 서구 치평동 5·18 자유공원 앞 공터에 건립했다.


"칠흑 어둠 속에서 별은 빛나고 혹한을 지나 들꽃은 피어납니다.

다만 지극히 낮고 뜨거운 열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타올라 영원한 들불 한 점, 밝은 별은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삼가 세상의 순결한 것들의 이름을 빌어

아름답고 고귀한 님들의 자취를 여기에 세웁니다."


- 임오년 오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


<박관현 약력>

1953.06.10 출생

1973.01. 광주고등학교 졸업

1978.03 전남대학교 법학과 입학

1980.05.14 ~ 16. 민족민주화성회 주도

1982.04.08 도피생활 중 체포

1982.05.04 징역 10년형 구형

1982.09.07 1심에서 징역 5년형 선고

1982.10.12 40여 일에 걸친 단식투쟁 중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1. 새벽 기관차 박관현 평전


 관현장학재단에서 박관현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담아 평전을 펴냈다. (링크)


2.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www.deulbul.co.kr/


3. 관현장학재단

 광주 서구 농성동 농성동 418-7번지 소재, 박관현 열사의 뜻을 기리는 장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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