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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y 13. 2020

[들불7열사] ③ 박용준, 5.18 투사회보의 작성자

1980년 5월, 그때 그 사람들

박용준


(1956년 7월 9일 ~ 1980년 5월 27일)


1. 천애고아(天涯孤兒)로 남겨지다


 박용준은 1956년 7월 15일 광주 동구 학동에 위치한 영신영아원에 맡겨졌다. 영아원 측은 자체 문서에 출생일자를 7월 9일로 기재했다. 아이의 발육 상태를 통해 추정한 날짜였다. 그는 천애고아로서 영아원에서 성장했다. 영신영아원 서경자 원장과 조아라 이사장이 그곳의 아이들을 보살폈다. 1964년 4월 28일, 초등학생이 된 박용준은 영신영아원에서 무등고아원(현 무등보육원)으로 옮겨졌다. '광주 동구 학운동 774번지 무등고아원', 이 주소는 그의 호적에 본적지로 등록된다. 끝내 입양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고아원을 본적지로 등록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이었다. 박용준은 무등고아원에서 서석초와 숭일중을 졸업했다. 그러나 고아원은 원생의 고등학교 진학을 도와주지 않았다. 남다른 학구열을 가지고 있던 그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 번은 광주 중앙초 근처에 위치한 소아과에서 잡일을 해주면 고등학교 진학을 돕겠다고 했다. 용준은 한동안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나 소아과 측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세상은 냉혹한 곳이었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그는 지칠 때면 영아원 서경자 원장을 찾아갔다.


 1972년 3월, 박용준은 숭의실업고등학교에 야간부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동안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번 돈을 털어 넣었다. 그야말로 고학(苦學)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무등고아원을 나와 영아원 시절부터 함께했던 서한성과 함께 달방에서 생활했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역시 산 너머 산이었다. 1973년 11월, 박용준은 영신영아원 서경자 원장으로부터 YWCA 신용협동조합에서 교도원으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서경자 원장은 영신원 원장이면서 동시에 YWCA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이기도 했다. 용준은 해당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1973년 11월 14일부터 광주 YWCA 신용협동조합에 교도원으로서 출근했다. 교도원은 조합 소속 조합원들을 찾아가서 수금하거나, 상담을 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 박용준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아예 광주 YWCA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2. 들불야학에 합류하다


 1970년대 후반, 광주 YWCA는 광주 지역 사회운동 진영의 교두보였다. 1977년, 국제앰네스티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은 전남대 학생운동가 출신 대동고 교사 박석무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광주 지역 재야인사들을 규합하여 국제앰네스티 광주지부를 만들고, 광주 YWCA 한편에 사무공간을 마련했다. 1978년 11월에는 양서협동조합이 광주 YWCA 2층에 들어섰다. 서재에 다양한 책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1980년까지 광주 YWCA는 전남도청 앞에 위치한 전일빌딩 옆에 위치했다. 박용준은 여러 지역 활동가들과 교류했고, YWCA에서 늦은 시간까지 독서를 하며 세상에 대해 배웠다. 그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해맑게 웃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자주 내보이곤 했던 함박웃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1976년 1월, 박용준이 제51차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는 그곳에서 김영철을 만나게 된다. 김영철은 광주 광천동에서 마을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1977년 2월, 김영철은 광주 YWCA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이내 박용준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김영철에게도 어머니와 함께 광주모자원에서 거주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해 11월, 김영철은 박용준에게 본인의 집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용준은 이를 급구 사양했지만, 영철은 리어카를 끌고 와서 YWCA에 있던 용준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영철은 기혼자였다. 김영철과 그의 아내 김순자, 박용준 세 사람은 광천동 시민아파트 A동 216호에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박용준은 행복했다.


 1978년 6월, 일단의 노동운동가들이 광주 광천동에 노동야학 '들불야학'을 설립했다. 들불야학은 광천동 광주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 35명과 함께 다양한 공부를 하는 야간 학교였다. 이들은 광천동성당 교리실과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터를 잡았다. 얼마 후, 김영철은 고등학교 동창 김상윤에게 들불야학 활동가들을 소개받았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천동 주민운동의 대표자로 여겨졌던 김영철에게 입학식 축사를 부탁했다. 1978년 7월 23일, 김영철은 들불야학 1기 입학식에 참석, 축사를 했다. 이후 김영철과 박용준 두 사람은 각각 생활강학과 특별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들불야학은 '야간학교'를 지향했지만, '교사'와 '학생'이라는 말 대신 '강학'과 '학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강학, 가르치면서 배운다. 학강,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이었다. 1979년, 박용준은 들불야학 공동체와 함께 하며 나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했고,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하는 것 역시 지속했다.  


3. 오월, 그날이 오다


 '1980년 5월 18일', 그날은 느닷없이 우리에게 왔다. 전날 밤 신군부는 전국 각지로 군대를 보냈다. 광주에 진주한 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령했다. 다음날 오전 9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군인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생들이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시내에 해당하는 금남로까지 행진했다. 금남로로 달려온 군인들은 거리를 삽시간에 피의 바다로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55명이 중상을 입었고,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다.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 월요일, 박용준은 여느 때와 같이 광주 YWCA에 출근했다. 당시 광주 YWCA는 금남로 부근에 위치했다. 오후 12시경, YWCA 사무실 1층에는 김영철, 박용준이 있었고 2층 양서협동조합에는 황일봉이 있었다. 느닷없이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박용준에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군인들은 학생으로 보이는 모든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었다. 주변 직원들이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군인들을 만류했다. 박용준의 가방을 뒤지던 군인이 YWCA 사원증을 확인했다. 그 순간 2층에 올라간 군인이 황일봉을 끌어내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학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광경은 YWCA 건너편에 있던 무등고시학원 학생들에게 목격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려도 되는가" 군인들의 야만에 분노한 학생들이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즉시 무등고시학원으로 달려갔다. 학원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폭행했다. 밖에 있던 군인들은 학원 건물 셔터를 기어서만 나올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렸다. 학생들은 곤봉을 피해 학원을 기어서 빠져나왔고, 군인들은 학생들이 학원을 기어 나오는 즉시 곤봉으로 폭행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학생시위는 민중항쟁으로 확대되었다. 5월 21일에는 시위 참가자가 10만 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당황한 군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바로 시위대를 향한 '집단 발포'였다. 수백 명이 총에 맞았다. 군인들은 학살 직후 광주를 빠져나갔고, 도시 외곽을 철저히 봉쇄했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날 밤, 박용준은 일기를 썼다.


"1980년 5월 21일 밤


오늘 오후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쓰러지는 우리 학생 시민들 품에 번지는 피! 그들이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희생하겠다. 헬기 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간 우리 학우 그리고 광주 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4. 투사회보를 작성하다


 5월 22일, 군인들에 의해 철저히 봉쇄된 광주에 남겨진 시민들은 각자의 역할을 찾아 나섰다. 들불야학 팀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유인물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 공간을 활용했다. 지금이야 프린터로 간단히 인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등사기'를 통한 작업이 필요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장소에서 원지를 긁은 줄판을 밀어야 했고, 100여 장을 복사하고 나면 새롭게 글을 적어야 했다. 박용준은 이때부터 투사회보 필경을 전담했다. 윤상원과 전용호가 글을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박용준은 전달받은 글을 등사 원지에 철필로 새겨 넣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었다. 박용준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들불야학 팀은 하루에 7천 ~ 8천 장의 투사회보를 등사기로 찍어냈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활동가들이 광주 전역을 돌며 유인물을 배포했다. 시민들은 박용준이 한 글자 한 글자 예쁜 글씨로 새겨 넣은 투사회보를 읽고 광주의 상황을 파악했다.


투사회보 5, 6호


 1980년 5월 25일, 들불야학 팀은 광주 YWCA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이미 시민들의 거점이었다. 이틀 후, 시민들이 최후까지 사수한 곳은 전남도청, YMCA, YWCA, 전일빌딩 등이었다. 광주 YWCA에는 더 좋은 성능을 가진 등사기가 위치했다. 들불야학 팀은 투사회보의 이름을 민주시민 회보로 변경, YWCA에서 민주시민 회보 9호와 10호를 제작했다.


5. 최후의 항전


 1980년 5월 26일, 시민들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계엄군의 광주 진입이 확실시되는 시점이었다. 누가 오늘 밤 도청에 남을 것인가,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함성은 여전했지만,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민을 이어갔다. 도청에 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남겨질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 많은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박용준에게는 돌아갈 곳도, 남겨질 가족도 없었다. 그는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YWCA에서 새벽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박용준은 YWCA 2층에서 유서가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일기를 썼다.


 "하나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 앞에 내놓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입니다. 그리고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고아라면 모두 이를 갈겠지요. 내 형제들, 어린 동생들, 이렇게 죽는 나로 말미암아 두세 겹의 고통과 멍에를 짊어지고 쓰레기로 태어나 쓰레기처럼 살 수밖에 별도리가 없겠지요. 하나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 이렇게 주님께서 갈급하게 구해야만 세상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사랑과 관용을!"


 곧 밤 12시가 되었다. 1980년 5월 27일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윤상원과 김영철은 전남도청 민원실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전남도청, YWCA, YMCA, 전일빌딩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박용준은 자주 흥얼거렸던 노래 '고아'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내 죄 아닌 내 죄에 얽매여

낙엽 따라 떨어진 이 한 목숨. 가시밭길 헤치며 걸었다.

배고플 땐 주먹을 깨물었다. 목마를 땐 눈물을 삼켰다.

의리로써 맺어진 우리 사이. 목숨까지 바치며 살았다."


 새벽 4시, 밤의 정적을 깨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계엄군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뒤이어 11공수여단이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을 점령했다. 전일빌딩에 당도한 군인들이 YWCA를 향해 M-16 자동소총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박용준은 YWCA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언젠가 환하게 웃으며 햇살을 받았던 곳이었다. 박용준은 그 자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들불7열사>


 엄혹했던 1970년대 후반. 광주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들불야학'이 있었다. 1980년, '들불야학'은 5·18 민중항쟁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렸고, 강학으로 활동했던 이들 7명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이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2002년, 살아남은 사람들이 들불야학 일곱 열사를 기리는 영구 불망(永久不忘)의 기념비를 광주 서구 치평동 5·18 자유공원 앞 공터에 건립했다.


"칠흑 어둠 속에서 별은 빛나고 혹한을 지나 들꽃은 피어납니다.

다만 지극히 낮고 뜨거운 열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타올라 영원한 들불 한 점, 밝은 별은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삼가 세상의 순결한 것들의 이름을 빌어

아름답고 고귀한 님들의 자취를 여기에 세웁니다."


- 임오년 오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


<박용준 약력>

1956.07.09 출생

1956.07.15 영신영아원 입소  

1964.04.28 무등고아원 입소

1973.11.14 YWCA에 교도원으로 입사

1975.02 숭일실업고등학교 졸업

1976.03 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1978.07 들불야학에 특별강학으로 합류

1980.05.22 투사회보 필경사로 활동

1980.05.27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던 중 산화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1. 5월의 불사조 박용준


 박용준 열사의 삶을 다룬 책으로 소설가 박혜강씨가 고인과 어린 시절을 함께한 서한성씨 등을 만나 다양한 증언을 책에 담아냈다. (링크)


2.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www.deulb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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