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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ul 05. 2020

[들불7열사] ⑦ 박효선, 오월을 노래한 문화운동가

1980년 5월, 그때 그 사람들

박효선


(1954년 10월 13일 ~ 1998년 9월 10일)


1. 연극에 몰두한 대학생


 박효선은 1954년 10월 13일 전라남도 광주시 동명동(현 광주 동구 동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1973년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연극과 예술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이 있었다. 박효선은 대학 입학 직후부터 전남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 중반 광주에는 황석영 작가가 있었다. 박효선은 운암동에 위치하던 황석영 작가 자택에 자주 왕래했으며 지역 문화운동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박효선은 1978년을 기점으로 본인의 예술적 소양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78년은 광주 지역 사회운동가들에게 상당히 큰 의미를 남긴 한 해였다. 몇 해 전 함평군 농협이 고구마 수매 약속을 지키지 않아 농민들이 막심한 손해를 보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1978년 4월, 농민들과 활동가들이 단식을 비롯한 맹렬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 결과 실질적인 피해 보상을 쟁취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해, 박효선은 마당극 '함평 고구마'를 통해 함평 고구마 사건을 기렸다. 마당극은 무대와 관객의 적극적인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연극 양식으로,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광주·전남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윤한봉은 1979년에 박효선의 마당극 '함평 고구마'를 관람했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 친구(박효선)를 1979년에 만났는데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싫어했어요. 막말로 북 치고 장구 쳐서 어떻게 독재정권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는 과격한 논리를 당시에는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이 친구와 논쟁을 많이 했죠. 하지만 친구는 저변을 확대하는데 문화만큼 훌륭한 도구가 없다, 그렇게 반론했어요. 그러던 중에 '함평 고구마' 공연을 봤는데, 거기에 반응하는 농민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연설이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도저히 이런 반응을 얻을 수가 없겠구나. 그때부터 문화운동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죠"


 박효선의 실력은 점차 지역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24일, 광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 무대에 '들불야학'팀이 등장했다.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 광주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야학이었다. 이날 이들은 무대에 올라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로 공연했다. 광주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가 노동청의 무능과 사업주의 횡포를 마주하는 내용이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책임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1979년, 박효선은 3기 특별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하게 되었고, '문화' 강학으로 활약했다. 그는 곧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신영일, 임낙평, 전용호 등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79년, 윤한봉이 장동로터리 인근에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물론 말이 연구소였지, 사실상 사회운동가들의 거점이었다. 윤한봉은 사재를 털어 풍물놀이를 마련한 후 박효선에게 이곳을 거점으로 문화활동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박효선은 윤한봉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극단 '광대' 창립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박효선은 대학을 졸업한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나,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극단 광대는 1980년 1월에 창립되었으며 3월에는 광주 YMCA에서 박효선이 집필한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을 진행했다.


2. 광주항쟁의 파도 앞에서


 1980년 5월 18일, 박효선은 임낙평과 함께 윤상원의 자취방에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윤상원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며 '계엄령 전국 확대'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박효선에게는 두 가지 계획이 있었다. 본인만의 소극장 '동리소극장'을 건립하는 것, 그리고 황석영의 소설 '한씨연대기'를 연극으로 연출하는 것이었다. 박효선은 두 가지 모두 어려워질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날 밤 박효선은 군인들이 무죄한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 구타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분노한 박효선은 극단 광대 단원들과 함께 광주항쟁에 뛰어들었다. 광주 전역이 들끓고 있었다. 1980년 5월 21일에는 광주시민 1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M-16 자동소총을 난사했고,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러나 군부가 바라마지 않았을 치안의 부재, 약탈, 방화와 같은 일은 해방광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은 서로가 가진 것들을 나누었고, 함께 거리를 청소했다. 들불야학 활동가들도 유인물 제작·배포를 비롯한 각자의 역할을 정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빠져나간 이후부터, 시민들은 매일 전남도청 앞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5월 23일, 광주 시민들이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진행했다. 이는 박효선이 김태종, 이양현, 윤상원 등과 함께 녹두서점에 모여 기획한 집회였다. 박효선은 재능을 살려 행사의 전반적인 진행과 퍼포먼스 등을 준비했다.


 1980년 5월 25일, 마지막까지 싸울 것을 결의한 광주 지역 활동가들이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개편했다. 박효선은 도청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항쟁은 점차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은 이미 확정 사실이었다. 다음날인 5월 26일에도 분수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지만, 그 속에서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박효선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도청과 YWCA에는 지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 YMCA에 있던 효선은 끝까지 그곳에 남아있지 못했다. 물론 그날 새벽 도청에 남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의무가 아니었으나, 그날 이후 살아남았다는 죄악감이 죽음의 순간까지 박효선을 괴롭혔다. 그는 '자백'이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은, 내가 5월 광주로부터 도피했다는 것이다.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총을 든 채로 도청 부근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고불고불한 골목길 달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갔을 때부터 총소리는 점점 시내 외곽에서 중심가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도청이 가까운 우리 집 지붕 위로 총탄이 날고 튀는 소리가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난 뒷 골방 속에 숨어서 그 총소리가 멈출 때까지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었다. 문득 도청 쪽에서 하늘 높이 조명탄 한 발이 길게 솟아올랐다. 난 어쩌면 살인자다. 그날 도청 전투에서 상원형이 죽었고 용준이도 M-16에 맞아 죽었다." - <박효선 전집 3 - 황광우 엮음, 연극과 인간>


3.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효선 지명수배서 '자칭 전남도청 홍보부장' 글귀가 선명하다


  그날 이후 박효선은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서 도피처를 찾아 밤 동네를 전전했다. 한동안은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 위치하던 노동운동가 김지선의 자취방에 머물렀고, 황석영의 누나 황선희나 소설가 홍희담과 윤성모, 정찬주 등의 집에서도 머물렀다. 그즈음 박효선은 윤한봉과 재회했다.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주도자였던 윤한봉 역시 서울에서 도피처를 전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변의 권유로 독일 대사관 망명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에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결행을 앞두고 박효선이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땅에서 움직여보기로 했다. 1981년 12월, 5·18 관련자들이 성탄절 특별사면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1982년 초, 박효선은 20여 개월간 이어진 도피 생활을 멈추고 자수했으며,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효선은 가장 먼저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의 동지였던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이 묻혀있었다. 이어 그는 항쟁 이후 정신이상 증세로 괴로워하던 김영철을 찾아갔다. 다음날, 박효선은 일기를 썼다.


 "어제저녁에 광천동 영철형 댁에 갔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살아남은 자가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을까?"


4. 평생을 도청항쟁지도부 홍보부장으로 살다


 1983년 11월 22일, 극단 '토박이'가 창단되었다. 박효선이 전남대 연극반 출신들을 중심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했다. 사실상 오월항쟁을 중점에 둔 극단이었다. 몇 년의 시간을 거치며 토박이는 점차 전문화되었고, 1987년에는 전문 극단으로서의 첫 작품 '산국'을 발표했다. 박효선은 이때부터 10년여간 광주를 알리는 연극 10여 편을 연출했고, 20여 편의 연극 대본을 남겼다. 특히 극단 토박이가 1988년 제1회 민족극한마당에서 발표한 <금희의 오월>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고, 전국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1989년, 극단 토박이는 마침내 자체 소극장인 '민들레 소극장'을 광주 북구 신안동에 마련할 수 있었다.


 1989년 2월, 국회에서 5공 청문회가 열렸다. 박효선 역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는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 했지만, 같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연극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93년, 극단 토박이가 <모란꽃>을 발표했다. 모란꽃은 5.18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다. 1994년, 극단 토박이가 '모란꽃'에 대한 순회공연을 미국과 캐나다 7개 도시에서 진행했다. 동포 사회가 모란꽃에 주목했으며, 어떤 공연은 3,200명이 관람했다. 1995년에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표되었다. 1996년에는 미국에서 진행된 5.18 16주년 기념행사에서 '금희의 오월' 공연이 진행되었다.


 1996년, 박효선은 광주 MBC와 함께 다큐 드라마 '시민군 윤상원'을 제작했고, 1997년에는 윤한봉에 대한 다큐멘터리 '밀항탈출'을 제작했다. 그해, 극단 토박이는 김영철 열사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청실홍실>을 발표했다. 이렇듯 박효선은 오월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도청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1998년 5월, 박효선이 취재진과 함께 김영철을 찾았다. 그러나 김영철은 박효선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박효선 : 나도 이름 끝 자가 선 자인데.

 김영철 : 박효선?

 ‥

 김영철 : (본인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 기획실장 김영철

 박효선 : 박효선이는?

 김영철 : 집에 가버렸지


 두 사람의 대화는 2004년 5월에 KBS가 방영한 '인물현대사 - 오월 광대 박효선'에 실렸다. 제대로 된 판단을 잃어버린 김영철의 발언에는 그 어떤 의도도 없었지만, 이것은 박효선이 평생에 걸쳐 스스로 마주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그즈음 박효선은 오월 비디오 영화 '레드 브릭'을 만드는 일에 모든 것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너무 무리한 삶을 살아서 일까. 1998년 7월, 박효선은 전남대 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해 8월 16일, 오월 그날 이후 지속적인 정신이상 증세로 괴로워하던 김영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박효선의 상태는 투병 2개월 만에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광주 고백교회 김성룡 목사가 임종예배를 집전했다. 1998년 9월 10일, 박효선은 "목사님 5월 그날 이후 저는 단 한시도 마음 편안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영원히 5.18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기억될 문화운동가 박효선은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들불7열사>


 엄혹했던 1970년대 후반. 광주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들불야학'이 있었다. 1980년, '들불야학'은 5·18 민중항쟁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렸고, 강학으로 활동했던 이들 7명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이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2002년, 살아남은 사람들이 들불야학 일곱 열사를 기리는 영구 불망(永久不忘)의 기념비를 광주 서구 치평동 5·18 자유공원 앞 공터에 건립했다.


"칠흑 어둠 속에서 별은 빛나고 혹한을 지나 들꽃은 피어납니다.

다만 지극히 낮고 뜨거운 열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타올라 영원한 들불 한 점, 밝은 별은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삼가 세상의 순결한 것들의 이름을 빌어

아름답고 고귀한 님들의 자취를 여기에 세웁니다."


- 임오년 오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


<박효선 약력>

1954.10.13. 출생

1973.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1978. 마당극 '함평 고구마' 연출

1979. 들불야학에 3기 문화강학으로 합류

1980.01. 극단 '광대' 창립

1980.05.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5·18 참여

1983.11. 극단 '토박이' 창립

1988. 연극 '금희의 오월' 발표

1993. 연극 '모란꽃' 발표

1994. '모란꽃'으로 민족예술상 수상

1998.09.10. 간암 투병 중 영면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1.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www.deulbul.co.kr/


2. 극단 토박이

박효선 열사가 세운 극단 토박이는 2020년 현재까지도 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민들레 소극장은 광주 동구 동명동 동계천로 111에 위치하고 있다.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gjtob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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