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순사건의 역사적 배경
지금부터부터 72년 전인 1948년 10월, 한반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평화로운 해안 도시 여수에서 열흘 간에 걸친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유산은 대한민국의 현재에 여전히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48년 한반도는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중심으로 격한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다. 5월 10일 우여곡절 끝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졌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불과 2개월 만에 '여수'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저항에 봉착하게 된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의 남조선 국방경비대 창설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군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태릉 1연대를 시작으로 연대 단위 향토 방위군을 편제했다. 1948년 이전에 이미 10개 연대의 편제가 완성되었다. 1948년에 들어서자 수원, 온양, 군산, 여수, 마산에 추가로 5개 연대가 깃발을 올렸다. 5월 4일에 편성된 여수 14연대는 광주에 주둔하던 4연대에서 차출된 이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4연대의 사병 모집은 다소 황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사병들에게 "이승만과 박헌영(남로당 당수) 중 누구를 더 선호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후 '박헌영'을 고른 사람들을 우선 입대시키는 방식이었다. 당시 14연대의 병사 모집을 좌익 장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사상의 자유'에는 이렇다 할 제약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반공주의자들로 채워졌지만, 향후 국가를 통치해나갈 사상적 기조에 대한 전 민중적 합의는 도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 내부에는 공공연히 좌익 성향을 드러내는 군인들이 상당했다.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좌익운동가들이 도피를 위해 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백선엽의 회고에 나오듯, "미군은 선서를 하면 진정한 군인이 된다고 생각했고", 사병들의 선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군은 이렇게 선서한다.
"나는 외부와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에 맞서 미국의 헌법을 지지하고 수호해나갈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I (name) do solemnly swear that I will suppor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against all enemies, foreign and domestic."
그러나, 당대의 한국군에게 선서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헌법'은 불과 3개월쯤 전에 통치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허구적 문서였지, 시민들의 합의된 의지가 아니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 전쟁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건설한 '국가'와 국제사회를 통해 법과 제도를 이식받은 '국가'는 너무도 다른 영역에 있었다.
남조선로동당은 대한민국군 내부의 좌익세력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 군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던 남로당계 군인들은 크게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로 나뉜다. '콤 서클'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으로 남로당 중앙당의 관리를 받았다. 이들은 사관학교 교육까지 받았기 때문에 조직의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세포들에 해당했다. '병사 소비에트'는 사병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으로 남로당 지역 지구당의 지도를 받았다. 일제하 지하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던 남로당 답게, 두 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다.
2. 여순사건의 전개 과정
1948년 10월 15일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10월 19일 자 제주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는 그해 4월 3일에 있었던 남로당 유격대의 봉기 이후 학살의 섬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제주 출동 명령은 사실상 양민 학살에 가담하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았다.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던 김지회 중위를 비롯한 남로당계 14연대 장교들은 아직은 무장 투쟁을 전개할 시점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우선 제주로 출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콤 서클'과 소통하지 않고 있던 '병사 소비에트' 소속 사병들은 제주 출동 명령 소식을 접한 직후부터 향후 대응책 마련을 고심했다. 남조선로동당 여수군당과 소통하기에는 시일이 촉박했다. 사병들은 병사위원회를 개최하여 토론을 진행한 끝에 제주 출동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인사계 사병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주도했다.
10월 19일 남로당 소속 14연대 사병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동족상잔 거부', '북한을 중심으로 한 통일'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봉기 주동자들은 이와 같은 거사를 행함에 있어 너무나도 경솔하게 행동했다. 이들은 환송식을 마치고 회식 중이던 14연대 장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그러나 봉기군에 의해 살해된 장교 15명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도를 받던 '콤 서클' 소속 비밀 당원들이었다. 결국 '병사 소비에트' 소속 남로당 사병들이 '콤 서클' 소속 남로당 장교들을 제거한 상황이었다. 오직 김지회 중위만이 "지리산에 가면 내 신분을 증명해줄 사람이 있다"고 호소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일 밤을 기점으로 군부대를 완전히 장악한 봉기군은 즉시 여수와 순천 시내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10월 20일 오전 여수 시내가 봉기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날 오후 3시에는 여수 중앙동 로터리 광장(현 여수 이순신 광장)에서 좌익 세력에 의한 인민대회가 진행되었다.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목윤이 인민대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이들은 "38선이 무너졌다. 동족상잔을 단연코 거부한다"고 선언한 후 6개항 결정서를 채택했다. 오후 5시에는 시가행진이 진행되었다. 당시 여수 인민위원회에 의해 채택된 6개항 결정서는 다음과 같다.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한편,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으로 진격하자, 순천을 방위하고 있던 광주 4연대 소속 남로당계 군인들이 이에 호응했다. 홍순석 중위를 필두로 한 좌익 군인들이 봉기군에 합류했다. 여수에서 인민대회가 개최되고 있던 10월 20일 오후 3시경이 되자, 순천 역시 해방구가 되었다. 이후 14연대 군인들은 빠르게 보성, 고흥, 벌교, 광양, 구례, 남원을 비롯한 전남 전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0월 21일 봉기군이 여수경찰서장 고인수와 사찰계 형사 10여 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정홍수 총무과장과 정주용 수사과장은 양심적 경찰로 분류되어 풀려났다. 한 가지 쟁점은 여수에서의 '인민재판' 개최 여부다. 흔히 여수 인민대회에서 공개적 인민재판이 개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여수와 순천에서는 공개적 인민재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자 김득중은 "봉기군이 여수와 순천에서 우익인사들을 살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순천에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단, 벌교와 구례에서는 인민재판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날 오후 대한민국 정부가 여순사건 진압에 나섰다. 송호성 준장이 지휘하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광주에 설치되었고, 봉기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10월 22일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이 순천역으로 달려왔다. 그는 지창수에게 '콤 서클' 소속 장교들의 생사를 물었다. 이현상은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나 남로당 장교 15명이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태의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는 "이때부터 석방된 김지회가 봉기군 지휘를 맡았으며, 그동안 당에서 애써 부식해 놓은 14연대의 수많은 장교 프락치들을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살해해 버린 지창수 일파의 경거망동을 개탄하여 마지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군인들이 '대의'의 이름으로 자행한 경행이 당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린 상황이었다. 1948년 4월 3일에 있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와 더불어 '14연대 군인들의 여순봉기'는 훗날 지리산에서 철저한 비판에 직면했다.
10월 23일 순천이 불과 3일 만에 진압군의 손에 떨어졌다. 진압군은 전국 각지에서 차출해온 10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방의 일부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여수는 이후 3일간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는 바다를 통해 여수에 접근한 함선들이 여수 시내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10월 27일 여수가 진압군의 손에 떨어졌다. 군 기록에 의하면 이때 반란군 392명이 사살되었고 2,298명이 투항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요 좌익운동가들은 이미 백운산, 지리산 등지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이후 산중에서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여수와 순천에 남은 시민들에게는 여순사건을 제압한 군인들의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압군은 여수 남국민학교에 사령부를 설치한 직후 시민들을 서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 동국민학교 등으로 끌어냈다. 군인들은 부역자들을 색출한 후 처단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짧은 사람, 손에 기름 떼가 묻어있는 사람도 처단 대상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
여순사건 피해규모는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부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최소 3천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여순사건이 남긴 것
'여순사건'은 이 땅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948년부터 2020년까지의 한국사를 검토할 때, 여순사건은 가히 전반기 역사의 최대 변곡점이었다. 군 내부 좌익세력의 봉기에 전율한 이승만 정권은 사건 한 달만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1948년 12월 1일 자로 시행된 이 서슬 퍼런 억압의 검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온존하고 있다.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을 저술한 김득중은 여순사건이 한국사에 끼친 결정적 영향인 '반공 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빨갱이는 여순사건 이전에도 있었지만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그 의미가 완전히 전도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했으며, ‘공산주의자=빨갱이=살인마=악마’ 라는 등식을 통해 이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타자로 규정했다.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극단적 타자화는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는데, 그것은 부정적 타자인 ‘빨갱이’에 적대적으로 맞서고 공격하는 주체로서의 정체성이었다."
'남북전쟁'이 미국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건이었다면, '여순사건'은 초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건이었다.
여수 시가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던 해군은 당시의 경험을 통해 상륙작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에 당시 작전 참가자로부터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여순과 같은 사태에는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하다"고 보고받은 신현준 사령관이 해병대 창설을 상부에 건의했다. 여순사건은 결국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의 계기가 된다.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군 내부 좌익 세력에 대한 '숙군' 작업이었다. 당시 군 내부에는 엄청난 숫자의 좌익 군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체 군인의 5~10%에 달했으며, 남조선로동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들 군 내부 좌익 세력을 일망타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 역시 생명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
여순사건 당시 해군 진압군으로 작전에 참여했던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여순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여순사건이 우리 군의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군내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숙군(肅軍)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군내에는 좌익분자들이 우글우글했다"
여순사건 직후의 '숙군' 작업은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14연대의 남로당 사병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고 순순히 제주를 향했다고 가정해보자. 대한민국은 6.25 전쟁 시점까지도 군 내부 좌익세력을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된, 엄청난 규모의 내부의 적은 전쟁 상황에서 특히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들이 전쟁 발발 후 차례로 내부 반란을 일으켰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일부 남로당 소속 사병들의 '경거망동'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동족상잔 거부'를 내세운 그들의 대의는 높게 평가하나 그들로 인한 희생과 후퇴를 생각할 때, 그저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