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7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들불지기의 일원으로 여순사건 사적지 기행에 함께했다. 이날 사적지 해설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오성 정책위원장님께서 진행해주셨다. 따라서 아래 내용은 그분의 해설에 빚지고 있는 내용임을 밝힌다.
1. 여수 14연대 주둔지
여수장례식장(전남 여수시 신월로 435)에서 300m쯤 직진하면 철조망에 가려진 한국 화약공장이 나온다. 20세기 초반, 이곳은 봉양, 신근정, 물구미라는 자연 부락들이 모여있던 평화로운 해안마을이었다. 1942년 일제가 이곳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수상비행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는 수상비행장을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고 패망했다.
1948년 5월 4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여수 14연대를 창설하여 이곳에 주둔케 했다. 14연대에는 좌익 성향이 짙은 군인들이 많았다. 남조선로동당이 관리하는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 소속 지하 당원들이 군내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14연대의 사병 모집은 다소 황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사병들에게 "이승만과 박헌영(남로당 당수) 중 누구를 더 선호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후 '박헌영'을 고른 사람들을 우선 입대시키는 방식이었다. 당시 14연대의 병사 모집을 좌익 장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 14연대는 약 2,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1개 연대에 해당하는 3개 대대 3천 명의 군 편제에 거의 근접한 수치였다.
그러나 봉기군은 불과 10 여일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은 무기를 소지한 채 지리산, 백운산 등지로 피신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국가보안법이 발효되기 시작했다. 여순사건 이후에도 이곳은 한동안 군 주둔지로 이용되었다. 1952년 12월 31일부터는 제15 육군병원이 자리했고, 한동안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쓰이기도 했다. 1976년부터는 한국화약공장이 입주하여 지금까지 가동 중이다. 그래서 여수 14연대 주둔지 터 부근에는 높은 건물이 없다.
2. 중앙동 인민대회장소(현 이순신 광장)
1948년 10월 20일 오전 여수 시내가 봉기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날 오후 3시에는 여수 중앙동 로터리 광장(현 여수 이순신 광장)에서 좌익 세력에 의한 인민대회가 진행되었다.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목윤이 인민대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이들은 "38선이 무너졌다. 동족상잔을 단연코 거부한다"고 선언한 후 6개항 결정서를 채택했다. 오후 5시에는 시가행진이 진행되었다. 당시 여수 인민위원회에 의해 채택된 6개항 결정서는 다음과 같다.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3. 종산국민학교 (현 여수중앙초등학교)
1948년 10월 27일 여수 14연대의 봉기가 불과 10여 일만에 진압되었다. 여수에 입성한 군인들은 여수 남국민학교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여수경찰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던 종산국민학교에도 군인들이 주둔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역자 색출' 작업을 시작했다. 많은 여수시민들이 종산국민학교, 서국민학교, 동국민학교 등지로 끌려와 사상검증을 받았다. 특히 종산국민학교에서 부역자 색출 작업을 하던 부산 5연대장 김종원은 부역자로 점찍은 시민들을 일본도로 목을 베어 죽이거나 권총으로 쏴 죽였다. 당시 색출 작업은 간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머리가 짧거나 손에 기름 떼가 묻어있거나 군용 팬티를 입고 있는 시민들은 모두 봉기군으로 간주당해 학살당했다.
여순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자의 상당수가 10월 27일 이후의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산국민학교는 1951년 9월 1일부터 여수중앙초등학교로 개명되어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4. 여수 신항, 애기섬 학살지
자산공원 전망대(전남 여수시 종화동)에 오르면 여수를 둘러싼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48년 10월 22일 부산 5연대장 김종원이 해군 상륙함 LST를 이끌고 여수 상륙을 시도했다. 이날 이들은 봉기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여수 상륙에 실패했다. 10월 26일 김종원이 재차 여수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해군의 박격포가 갑판의 반동으로 인해 제대로 조준되지 않았다. 결국 해군이 실시한 무차별적인 함포 사격은 여수 시가지를 향해 이루어졌고 많은 여수 민간인들이 함포 사격 및 그로 인한 화재로 사망했다.
여수 시가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던 해군은 당시의 경험을 통해 상륙작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에 당시 작전 참가자로부터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여순과 같은 사태에는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하다"고 보고받은 신현준 사령관이 해병대 창설을 상부에 건의했다. 여순사건은 결국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전망대를 통해 바다를 보면 작은 섬과 그보다 더 아기자기한 섬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예로부터 '애기섬'이라 불렸는데, 6.25 전쟁 당시에는 민간인 학살지로 이용되었다. 두 섬을 해류가 휘감고 있어 시신을 유기해도 시신이 뭍으로 떠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5일 대한민국 정부가 좌익 출신 민간인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여수 보도연맹은 물론 여순사건 관련자들로 구성되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여수 보도연맹원들은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들은 애기섬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당시 육군본부 특무대에 소속되어 있던 인물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애기섬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약 120명 정도라고 한다.
2019년 7월 26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와 여순사건유족여수유족회가 애기섬에 원혼비를 세웠다.
5. 만성리 형제묘,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서 여순사건 부역자로 분류된 여수시민 125명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이들은 5명씩 조를 지어 총살을 당했다. 이후 25명씩 5개 장작더미에 쌓인 시신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의 증언이다. 현재 이곳에는 '만성리 형제묘'가 위치한다.
만성리 형제묘에서 마래터널 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만성리 학살지가 있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 부역자로 분류된 이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되었다. 현재까지 이때 학살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11월 13일부터 진행된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10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어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이 살해된 이후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이 작은 돌을 던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으며, 여러 돌탑들이 자연스럽게 위치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