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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6. 2020

INTP-T 사회운동가로 살아가기

[좌파 인팁], INTP-T 활동가의 답 없는 인생 스토리

 '인간이란 무엇인가?' 상당한 인간들이 일생에 걸쳐 천착하는 질문이다. 나에게도 물론 그렇다. MBTI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질문을 꺼내 든 이유는, 결국 MBTI도 인간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능의 만족을 유예하고 문명을 건설한 이래, 사회는 언제나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왔다. 인간들의 동일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문명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에 따라 인간의 다름에 대한 고민 역시 문명의 전진과 더불어 지속되어 왔다.


 MBTI는 인간을 특정 성향에 따라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물론 여러 비판 지점이 있으나 나는 MBTI의 인간 분석 척도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향성'은 상당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단, 과몰입과 선입견으로의 확장은 경계해야 한다. 언제나, 단언하는 버롯은 좋지 않다.


 나는 INTP-T, 인팁이다. 그리고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사회운동가'다. 물론 사회운동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보다 정확히 규정한다면 '좌익운동가'(좌파)로 분류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요새 주변 활동가들과 'MBTI'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다. 함께 활동하는 이들의 MBTI는 많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ENFP, INFP, INFJ, ENFJ, ENTJ, ESTJ. 나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한 INTP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어쩌다 인팁이 사회운동가로 살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인팁에 대해 써보려 한다.


1. 활동가가 된 이유


 청소년 시절, 나는 좋아하는 것들에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평범한 인팁이었다. 나는 그 어떤 규범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8시 20분까지 등교해야 한다는 룰을 어기는 건, 나의 본질과 관계된 문제였다. 3년 내내 나 홀로 10시 등교를 했다. 개근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졸업에는 문제가 없었다. 금기를 깨고 싶다는 생각에 술과 담배와도 친하게 지냈다.


INTP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때문에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기존의 전통, 질서, 절차에서 해방됨에 따라 자유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의 최대 관심사는 '역사'였다. 인팁이라 그런지, 나는 특정 관심사가 생기면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일어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역사 5·18은 나의 청소년 시절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매일 5·18과 관련된 책을 읽었고 더 세부적이고 디테일한 사실들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외우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도 5·18 묘역에 가면 대부분의 묘와 관련된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다.


INTP는 몰입을 통해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인식을 축적한다. 흔히 인팁이 16가지 MBTI 유형 중 지능이 가장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간의 지능이 성격 유형에 따라 나누어질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팁의 '선택'과 '집중'은 천재성의 핵심과 맞닿아있다. 천재성의 핵심은 불균등성이다.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엄청난 인식을 가지나, 관심이 적은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팁의 특징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인팁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소수 천재가 되거나, 덕후의 삶을 산다.


 어린 시절부터 태생적으로 사회에 녹아들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다양한 폭력을 겪으며 살아왔다. 이 시절 나는 스스로가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광주의 아픔 및 소외감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비슷한 류의 폭력을 반복적으로 직시해야 하는 존재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호러 영화'가 유행했던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청년들의 트라우마 치유적 요소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광주에 천착했다. 광주의 영상과 사진을 반복적으로 봤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아픔만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었다. 그 도시의 열흘에는 부당한 폭력에 당당히 맞서 싸운 시민들의 명예와 긍지가 있었다. 역사에 대한 나름의 인식 체계를 가지게 된 후, 나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인간이고 싶었다.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거대한 싸움의 길에서 누군가 이끌어주는 이를 따라 싸우고 죽는 한 사람의 병사이고 싶었다. INTP들은 스스로가 믿는 가치가 도전받는다고 느낄 때, 기꺼이 투사가 된다. 나에게 2013년은 투사가 되어야 할 이유로 차고 넘치던 시대였다. 그러던 중,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 모 청소년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같이 가보자고 제안해왔다.


 해당 단체는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 광주지부로 NL(통일을 강조하는 사회운동 세력), 그중에서도 경기동부 계열로 분류되는 사회운동 단체였다. 처음에는 '입시 타파'라는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 요소가 들어있는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단체 구성원이 되어 이들 단체가 주도하는 집회에 자주 나갔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하여 둘로 쪼개진 2013년 5·18 기념식 때에는 묘역에서 밤을 새우고 오전에 자체 집회를 가진 후 구 묘역에서 별도로 기념식을 진행했다. 당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과 밤을 새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자리에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도 있었다. 나는 얼마 후 통합진보당에 입당, 청소년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INTP는 분석하는 사람이다. 나는 집단에 완전히 융화되지 못했고, 심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를 유지했다. 사실상 조직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였던 것이다. 인팁들은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도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고 모든 것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곤 한다. 점차 조직의 잘못된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희망은 구시대적이었고, 위계-폭력의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한 곳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2014년 8월 아수나로 광주지부가 개최한 '씨알이 먹히는 수다회'에 참여한 후 강해졌다.


 나는 이전에도 나이를 바탕으로 한 위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안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수나로는 나이와 별개로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거나, 서로 편하게 말 함으로써 위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나이 많은 자에게는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나는 이들 집단이 궁금했다. 그래서 수다회에 참여해서 이들을 관찰했다. 순수한 호기심에 여러 질문을 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위계 문화에 익숙한 입장에서 내보인 나의 호기심은 그들에게 상당히 무례하게 비쳤을 것 같다.


INTP는 계급에 경례하지 않는다.


 이후 나는 희망에 문제제기를 했다. 당시 광주 희망의 조직 구조는 '운영위원'과 '운영진'으로 이원화되어있었는데, 성인들이 운영위원을 맡고, 청소년들이 운영진을 맡는 식이었다. 운영위원들은 청소년들의 연애관계를 두고 토론을 진행하는 등, 시혜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이에 운영진들이 '운영위원들에게 바라는 점'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전달했다. 그럼에도 조직은 달라지지 않았고, 2014년이 되자 구성원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될 경우 운영위원이 되지 않으면 단체를 나가야 하는 점도 한 몫했다. 하필 이 시점에 나는 '중고생 연대'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중고생 연대'는 청소년 당권 문제를 두고 통합진보당과 희망에 문제제기를 지속해온 곳이었다.


 희망 구성원들은 외부의 목소리를 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희망은 사회운동 단체였지만 종교단체와 같은 특유의 고립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러나 인팁들은 편견을 가지지 않고 열린 태도로 세상을 관찰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단체를 비판해오던 중고생 연대 관계자들을 만났다. 다른 목소리도 들어보고 검토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판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중고생 연대는 '희망' 세력의 통합진보당 청소년위원회 운영 방식이 패권적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통합진보당 청소년위원회는 '희망' 소속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희망 활동가들은 경기동부 소속 40대, 50대 활동가들의 자녀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통합진보당 청소년위원회 규약에는 "당원의 10%가 동의할 경우 운영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고 되어있었다. 이에 전체 청소년 당원 60명의 10%에 해당하는 희망 소속 청소년 당원 6명이 회의를 소집, 운영위원 12명을 선임했다. 전원 희망 소속이었다. 희망에 속하지 않은 다른 청소년 당원들에게는 이와 같은 사실이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 집단의 '습성' 그 자체였다. 나는 이때부터 중고생 연대와 함께 희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2014년 12월 14일에는 통합진보당 중앙당 당직자들과의 면담에서 청소년 당권 회복을 요구했다. 우리들의 요구에 중앙당은 청소년 당권 회복을 수용했으나, 불과 5일 후인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지만 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던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경남연합과 같은 '정파'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조직이었다. 경기동부 계열로 분류되는 광주 희망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중고생 연대의 비판을 접한 직후부터 정파 및 진보정당의 역사에 몰입했다. 관련된 텍스트들을 섭렵했고 정파들의 역사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NL 세력이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반동임을 절감했다. 당시 희망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은 본인들이 NL 세력이 운영하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14년 12월 수능을 막 마친 상태였던 나는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희망에서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고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몇몇 구성원들이 물리적으로 피해자를 막아섰다. "이건 두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야"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도 동원되었다. 결국 피해자는 고소를 포기했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가 논의되었다. 조직은 가해자에게 공장에서 2개월간 노동할 것을 명령했다. 노동이 형벌로 부여된 것이다. 두 달 후 조직의 윗선은 돌아온 가해자를 단체 대표로 세우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깊이 분노했다.


 며칠 후 나는 단체 대표를 찾아가서 이번 일을 강력히 비판했다. 나의 비판을 들은 대표는 그 어떤 답변도 내놓지 못했다. 30대 중반을 넘긴 남성이 청소년의 비판에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들에게는 '옳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지난 2년간 함께 활동해왔던 이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몇몇은 나를 진심으로 배신자로 여기고 경멸했다.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잘못되고 부당한 것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INTP는 다른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 집단에서 오래 버틸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이로써 2년 간의 활동을 마치고 법적 성인이 되었다.


2. 부당함에 대한 반감


 1년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저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교수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이 거슬렸다. 하나하나 반론해주고 싶었다. 특히 형법총론 시간에 학교 밖 청소년들을 비하하는 교수의 발언을 듣고 난 후부터는 더 이상 학교에 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렸다. 조직에서도 버려지고, 어느 집단에서도 스스로 이방인이 되니,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러던 2015년 12월, 지인 A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광주 모 특성화고 3학년 학생이었고 '현장실습생'으로 모 휴대폰 가게에 취업해서 일하고 있었다. '현장실습'이란 특성화고가 사업주와 계약을 맺고 고3 학생을 사업장에 파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사업주는 그의 월급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고, 그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정강이를 걷어차고, 심한 욕설을 했다. 나는 이와 같은 부당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인에게 함께 싸우자고 했다. 우리는 사업주에게 체불임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광주광역시 노동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결과 체불임금이 총 205만 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나와의 통화에서 사업주는 "A는 현장실습생이라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확인 결과 사업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보다 앞선 2011년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일하던 영광실고 현장실습생 김민재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A와 똑같이 현장실습 계약을 맺고 공장에 파견되었던 그는 주 60시간이 넘는 고강도 노동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는 대책을 발표했다. "현장실습생이라고 해도 현장 노동자와 똑같이 일하면 노동자로 인정하고 권리를 보호한다" 이에 따라 A는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자 사업주는 학교 교사들을 통해 A를 따로 불러냈다. 교사들은 A에게 "김동규는 이상한 새끼니까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다. 사업주는 A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당장 생활비가 급했던 A는 사업주의 요구를 수락했다. "사업주(갑)는 A(을)에게 금 65만 원을 지급한다. 을은 갑에게 더 이상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합의서가 쓰인 직후, 사업주는 우리 두 사람을 정보통신망법 상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얼마 후 광주 남부경찰서에 출석해서 조사를 받았다. 몇 달 후에는 광주지방검찰청에 출석해서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이 시기 나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였던 형민의 권유로 한동안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성경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닌 '신천지'였다. 나는 다행히 2달 만에 신천지 센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전도했던 형민은 그곳에서 5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올해 초 형민과 함께 <나는 신천지에서 20대 5년을 보냈다>라는 책을 출판했다. 당시 이야기는 해당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준거집단을 상실하고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기관의 조사까지 받게 된 나에게는 도움을 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의당 광주광역시당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했다. 나는 그 길로 정의당 당원이 되었다. 다행히 검찰은 명예훼손 사건을 무혐의 종결했다. 얼마 후 2016년 총선 당시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 출마했던 정의당 문정은 후보가 광주청년유니온에서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때부터 다시 5년간 광주에서 활동가로 살았다. 광주청년유니온에서 기획팀장과 노동상담팀장을 맡아 일했고, 정의당 광주광역시당에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시민단체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2년간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현명한 은둔자였다. 그랬던 내가 활동가로서의 삶을 꽤 오래 지속한 것은, 결국 부당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3. 대중운동의 경험을 통해 고도로 사회화된 INTP


 요새 나는 지인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스스로를 '대중운동의 경험을 통해 고도로 사회화된 INTP'로 소개한다. 나는 여전히 인팁이지만 지난 8년간의 활동을 통해 ENTJ나 ENFJ만큼이나 사회화되었다. 아니,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을 연기하며 어떤 자리를 버텨낼 정도는 된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조직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난 5년간 내가 가장 잘 해냈던 일은 언제나 혼자서 하는 일이었다. 5.18 자료집을 만든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어떤 집단과 싸우는 일이 그러했다. 나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어도 해당 집단의 사업을 함께 진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홀로 움직여왔다. 여전히 꼭 하고 싶은 일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다른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번외로 1년 내내 슬리퍼를 신는다. 인팁들은 다 이해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진정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상이 아닌 기질일 것이다.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기질이 온존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의 경험을 통해 아주 섬세하고 성능 좋은 가면도 생겨났다. 주변 사람들이 죄다 INTP라는 ENFP는 나처럼 사회화된 인팁은 처음 봤다고 했다. 학습의 결과인지 말도 어느 정도 잘하고 학습된 배려도 한다. 하지만 진짜 내 모습은 아닌 것 같아 이상할 때도 많다.


 그런 내가 그나마 여기서 잘 지낼 수 있는 건, 아마 주변인들의 섬세함 덕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이, 경험, 학력,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다.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지만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이방인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구성원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INTP는 집단생활을 선호하지 않지만, 집단의 잘못된 점을 잘 캐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단에게는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혁신적이기도 하다. 얼마 전 모 사회학자가 나와 형민을 비롯한 신천지 탈퇴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요새 그 결과로 쓰인 논문에 등장하는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의 이야기가 자주 떠오른다.


유럽의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처럼, 사회 내의 구성원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사회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짐멜은 이방인이라 불렀다. 존재 그 자체로 이방인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및 사회와 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특수한 상호작용의 형식이 이방인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짐멜은 이들을 자유로운 시선에서 또 객관적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라 하였다.


 나는 INTP임과 별개로 자주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정체화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어떤 집단에 있어도 진짜 구성원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새는 자유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삶도 만족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많이 지치거나, 혹은 먼 훗날(?)에, 다시 아름다운 나만의 세상을 가진 은둔자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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