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현장실습생 고 홍정운님의 소식을 접하고
또 죽었다.
며칠 전, 기사를 하나 읽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 학생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홍정운은 현장실습으로 나간 요트업체에서 수중 작업을 했다. 7t 크기 요트 바닥에 붙은 조개, 따개비 등을 긁어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산소통과 잠수용 추를 매달고 있던 그는 산소통 줄을 고쳐 매는 과정에서 물에 빠져 숨졌다. 이것은 실습이 아니었다. 강요된 고강도 노동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장 서글픈 건, 나에게 이 소식이 너무도 익숙했다는 사실이었다. 2017년 1월 "아빠 콜수 못 채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에 대한 기사를 기억한다. 그 역시 현장실습생이었으나, 콜센터에서 고객들의 폭언을 들으며 노동했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 소희'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해 11월, 제주도의 생수공장에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한 이민호는 입사 5일 만에 혼자서 기계를 조작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3번이나 사고가 났다. 3번째 사고 당시 압착기에 눌려 큰 부상을 입은 이민호는 11월 19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시민들이 남긴 추모 엽서들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이 사회와 어른들이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어요. 미안합니다 부디 편히 쉬세요"와 같은 글귀들이 여전히 마음속을 맴돈다.
2018년 11월, 광주에서 고 이민호님의 추모문화제가 진행됐다. 당시 청소년 노동인권 관련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내가 실무를 맡았다. 이후 이민호님 아버님을 모시고 강연을 열기도 했고, 광주시교육청과 함께 현장실습 참여 사업체에 대한 민·관합동점검을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들려오고야 만다. 무엇이 변했는지, 도무지 감각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회와 어른들'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글은,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특성화고 현장실습과 관련된 일을 하는 시민단체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나의 과거에 있었다. 이 사회와 어른들이 어떤 존재인지, 이 사회에서 '특성화고'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감각했던 날들의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16년, 나는 휴대폰 가게에서 일하던 특성화고 3학년의 친한 동생 A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광주 모 특성화고 측과 휴대폰 가게 측이 체결한 협약서에 따라 그곳에서 '실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 가게에서 제대로 된 실습이 진행될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그곳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인력 A를 싼 값에 데려온 곳이었다. A는 주 6일제로 매일 11시간씩 일했다. 점장은 욕설과 폭행을 비롯한 직장 내 괴롭힘을 행했다. 정강이를 발로 차고, A를 '개새끼'라고 불렀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일한 A가 손에 쥔 돈은 100만 원이었다. 101만 1240원이 아니라, 정확히 100만 원 말이다.
A는 3개월을 일하다 그만뒀다. 마지막 달에도 며칠을 제외하고는 출근 일수를 꼬박 채웠다. 그러나, 마지막 월급은 12만 원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을 잠시 했지만, 같이 싸우겠다고 못 받은 돈 받아내자고 했다.
우리는 광주광역시 노동센터를 찾아가서 노무사에게 상담을 받았다. A가 3개월간 체불당한 임금은 총 204만 원이었다. 이후 나는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체불임금을 요구했다. 점장은 사장을 연결시켜 주었고, 사장은 "A는 현장실습생이라 그렇게 적게 받는 게 맞다"고 했다. 같은 정도의 차별을 겪고 있었지만 직원들은 회사 편이었다. 전화를 걸어와서 "야, 만나서 얘기하자", "그깟 돈 몇 푼 받으려고 이러냐"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장은 '현장실습생'이라서 돈을 적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명목상 현장실습생이라 할지라도 사업장 노동자와 동일하게 근로시키는 경우 노동관계법에 따라 노동자로서 인정하고 권리를 보호한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제도 개선대책 2012.4.17.)"
대한민국 정부가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노동권을 규정한 현장실습제도 개선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문장은 당연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영광실고 3학년 김민재씨가 현장실습생으로 기아차 광주공장에 파견됐다. 그는 실습생이었지만, 사실상의 노동자로 주 최대 72시간에 달하는 고강도 노동을 했다. 친구들에게 어지럽다고 이야기했던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사회와 세상이 그의 미래를 빼앗았다. 주야 10시간 맞교대, 잔업, 특근을 하며 유기용제로 가득 찬 자동차에 페인트를 분사하던 그는 오늘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부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제도 개선대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대책을 근거로 현장실습생에게는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업주의 말을 비판했지만, 사업주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에 회사를 고발하는 글을 썼다. 해당 글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자, 사업주는 비로소 글을 삭제해 달라며 체불임금을 주겠다고 했다. 다시 어른들이 나섰다. A가 다니던 학교 교사들이 등장했다. 사업주가 학교, A와의 3자대면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지 못한 그 자리에서 대표는 체불임금 64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학교 교사는 그걸 받고 끝내자고 A를 설득했다. 나에 대해서는 "만나서는 안될 이상한 새끼, 지 일도 아닌데 나서는 놈"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원하는 결말은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는 것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A는 그 돈을 받고 합의서를 써주었다. 당장 생활할 돈이 없었다.
합의서
갑(회사)은 을(A)에게 금 64만 원을 지급한다. 을(A)은 갑(회사)에게 더 이상의 민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얼마 후, 대표는 나와 A를 명예훼손죄로 광주 남부경찰서에 고소했다. 그는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신이 쓴 글 때문에 상무점에 5천만 원의 손해가 발생한 부분은 민사소송을 통해 청구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얼마 후 경찰에 출석해서 5시간 동안 조사받았다. 광주지방검찰청에도 출석했다. 나는 이때의 분노감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이 사회의 적절한 개입이 있었다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을 달랐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는 이날, 어른들과 세상에 깊이 실망했다.
다행히, 검사는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내 사건이 수사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에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서 한 청년 노동자가 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숨이 막혀왔다. 특성화고 3학년 때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해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그는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고 다음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추모벽 앞에 생일 케이크가 놓였다. "힘없는, 너는 나다"라는 말은 눈물로 쓰였다. 하염없이 울었다. 힘없는 너는, 또한 나였고, A였고, 특성화고에 재학 중인 누군가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사고 이후, 또 다른 사고 이후에도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빠 콜수 못 채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현장실습생의 죽음 이후에도, 혼자 일하던 중 기계에 몸이 끼어 세상을 떠난 현장실습생의 죽음 이후에도. '다음 소희'의 죽음은 끝없이 반복됐다. 결국 우리는 여수의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생이 차가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라는 말조차, 아무런 힘이 없다. "우리는 이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수렁에 빠진 듯, 깊은 실망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