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 기고⑨] 광주청지트의 내구제대출 보고서와 특성화
최근 영화 <다음 소희>를 계기로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특성화고는 ‘학벌’이 곧 계급인 사회에서 일찍이 대학 진학의 길에서 밀려난 청소년들을 값싼 노동력 명목으로 노동시장의 말단에 밀어 넣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사실상의 인력사업소로 기능했다. 법률을 제정해 취업 가능 연령을 고등학교까지 낮췄고, 특성화고 3학년 학생이 1년 동안 현장에서 일하면 출석한 걸로 보고 졸업장을 줬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실습생’ 명목으로 현장에 나갔으나 실상은 그냥 조기 취업한 노동자였다. 한국은 독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형 마이스터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 제도는 애당초 일할 사람보다 일자리가 더 많던 고도성장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취업 연령을 고등학교까지 낮춤으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산업교육진흥법이 제정된 1963년 이래 약 60년간 특성화고를 거쳐간 모든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지독한 차별에 직면해왔다. 특성화고는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가 됐다. 정부가 기업을 살리기 위해 비정규직 양산을 용인한 2000년대 초반에는 많은 특성화고 학생들이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러나 대기업이 특성화고 학생들 대신 군필 초대졸(전문대 졸업)을 더 선호하게 되자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가 경제 환경에 따라 정책 방향을 바꿀 때마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그 영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삶과 진로가 시장 상황과 정부 정책에 따라 변했다. 이것은 성적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인문계고 학생들의 삶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 불린다. 이는 다가올 위험을 미리 경고해 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마치 광부들이 탄광에 데려간 카나리아가 일산화탄소와 같은 유독가스를 감지한 후 이상반응을 통해 광부들에게 탄광의 상태를 경고하듯, 한국은 세계 시장의 위기를 미리 경고해 왔다. 이것은 한국이 자국의 수출입 동향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도 정확하게 발표함에서 비롯됐다.
매월 1일,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는 월간 수출입 동향을 발표한다. 빠르고 정확하게 어제까지의 수출입 동향이 공표된다. 어떤 산업에서 수출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수출과 수입의 증감 추이는 어떤지 전 세계 어디보다도 빠르게 알 수 있다. 우리는 3월 31일까지의 일이 4월 1일에 공개되는 것만 봐도 한국 사회가 수출입에 얼마나 면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외면한 곳에서는 있어야 할 통계와 기본적인 조사 보고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분야라는 걸 공인이라도 받듯, 모든 게 스산하다.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은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실습 도중에 당한 산업재해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를 작성한 바 없다.
근로복지공단이 현장실습생 산재보험 가입자들의 산업재해 관련 자료를 단순 추출한 자료는 있지만 현장실습생의 산재를 별도로 조사한 통계는 없다. 고로, 영화 <다음 소희>와 같은 일이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 사회의 대답은 ‘알 수 없다’로 요약된다. 현장실습 문제 해결을 위해 약 20년간 활동해 온 광주전자공고의 임동헌 교사는 “관계 기관들은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가서 어느 정도의 피해를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 의지가 전혀 없다”고 했다.
국가가 외면한 곳에서 우리는 늘 ‘관심 없음’의 가혹한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때론 소외된 이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줬다. 국가기관의 의지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약자들은 통과의례를 치르듯 그것들을 견뎌야 했다.
지난 3월 24일,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광주청지트)가 ‘내구제대출 피해 실태조사를 위한 초기 인식조사 및 피해 사례 조사’ 보고서를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내구제대출은 약 20년 전부터 취약계층 청년들을 대상으로 횡행해 온 불법대출이다. 내구제대출은 대출이 시급한 대출 희망자가 본인 명의 휴대폰을 개통해 브로커에게 넘기면 브로커가 그것을 판매한 후 수수료를 챙기고 판매 금액의 일정 부분을 대출 희망자에게 건넴으로써 성립된다. 이 과정에서 대출 희망자가 넘긴 휴대폰이 대포폰으로 활용돼 추가적인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지난 20년간 내구제대출 피해 규모와 피해 유형 등에 대한 조사를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구제대출 문제에 대한 정부 기관의 공식적 통계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으며, 금융감독원은 “내구제대출은 대법원 판례 등에 비추어 볼 때 대부업법 등 금융 관련 법령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련 업무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마치 특성화고 학생들의 산업재해 통계가 근로복지공단의 파일뭉치 속에 숨겨져 있듯, 내구제대출 피해자들의 피해 사례는 법원이 생산하는 양산형 판결문에 남겨져 있다. 본인 명의 휴대전화를 타인에게 넘기는 행위는 전기통신사업법에 의해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내구제대출 피해자들은 피해자가 아닌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사범으로서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들은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피해 사실을 숨기게 되며, 국가의 관심 밖에 있는 내구제대출 피해 규모를 짐작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광주청지트는 “지금껏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내구제대출 업자보다 대출자(피해자)가 더 많다”며 “이는 내구제대출 문제 해결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내구제대출을 비롯한 불법 대출 피해에 노출돼, 광주청지트의 이번 조사에 응한 이들의 학력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오랜 구직 활동과 질병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실직 상태가 그들로 하여금 내구제대출을 이용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포털사이트 등에 ‘대출’을 검색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피해에 노출됐다.
3월 31일까지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이뤄진 총수출이 얼마이고, 그 증감률은 몇 퍼센트인지에 대한 통계를 4월 1일에 발표할 수 있는 대한민국은 정작 자국의 노동계급 청소년들이 학교 대신 공장에 ‘실습’ 나가서 얼마나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20년간 같은 일이 반복돼 왔음에도 불법금융 내구제대출 피해를 입은 경제적 소외계층의 삶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국가가 외면한 곳에는 늘 약자들의 고통이 있었으며, 가장 지독한 차별이 있었다. 나는 특성화고를 졸업한 어느 ‘소희’의 삶과 내구제대출 피해 사례를 생각하며, 국가가 외면한 곳에서 펼쳐지고 있을 어떤 삶의 여정을 떠올려 봤다. 통과의례를 치르듯, 가난과 폭력, 노동시장에서의 어려움과 차별, 경제적 지식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겪었을 어떤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