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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Aug 25. 2024

어느 나주 사람들의 5.18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날은 어떤 영향을 줬을까

지난해 나주의 5.18 당사자를 취재하러 갔을 때 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동네 친구 다섯이 43년 전의 대사건에 연루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다섯은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소꿉친구였던 것이다. A씨는 43년이 지난 지금(2023년)에 와서 돌아보니, 이들 중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자신 뿐이었다고 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도청 앞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행한 후 광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광주를 봉쇄해 마치 영화 <택시운전사>의 광주처럼 철저히 고립된 섬으로 만들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탈취한 군용 차량을 이용해 전남 각지에서 무기를 모았다. 화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얻었고, 나주에서 총기를 공수했다. A씨와 친구들도 분위기에 이끌려 시민군 차량에 탔다. 총을 들고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문제는 항쟁이 끝난 후에 터졌다. 광주에 갔던 친구 중 한 명이 칼빈 소총을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차에 경찰에게 발각됐다. 경찰은 이 친구를 시작으로, 5.18 때 광주에 갔던 A씨 등 다섯 명을 차례로 검거했다.


1963년에 태어났던 이들 다섯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서슬이 퍼랬던 당대의 국가권력은 이들을 상무대로 보냈다. 경찰은 이들이 '광주사태'에 참여했음을 밝혀냈다. 모진 고문이 있었다. 끔찍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있었다. 이것들은 분명 당대에도 대한민국의 법률에 의해 엄격히 금지돼 있었지만, 그때 그 조항들은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5.18 관련자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석방됐다. 고등학생이었던 이들은 몇 달도 안 돼 풀려났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땅의 지배자들이 '빨갱이'라 부르는 국가의 적이 되어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정상적인 삶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됐다.


1982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김광호씨가 사망했다.


나주 출신으로 5.18 당시 광주농고에 다녔던 그는 1982년 4월 11일 사망했다. 사인은 전신타박상이었다. 그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A씨와 함께 광주에 갔었음을 진술했었다.


김광호씨는 국립5.18민주묘지 2-81 묘소에 묻혔다. 그러나 오늘 묘역을 살펴 보니 그의 묘소는 비어 있었다. 가족들이 이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혹여 그렇다면..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04년, 이들 중 두 번째로 강석신씨가 사망했다. 그는 국립5.18민주묘지 5-31 묘소에 묻혔다.


A와 함께 5.18에 연루됐던 다른 두 명은 2023년 현재 생존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주기적으로 정신병원에 내원하고 있다.


A씨는 이 다섯 중 그나마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건 자신 뿐이라고 했다. "다른 넷은 장가도 못갔고, 평생 고생만 했다"고 말했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당대의 시대상을 생각할 때 이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A씨는 갇혀 있던 시기의 일 때문에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다. 소변을 보지 않으면 엘리베이터에 탈 수 없다. 긴장이 되면 소변이 마렵기 때문이다.


몰랐던 5.18 당사자 여럿의 삶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의 삶은 과연 기억되기나 할까? 이렇게 되어 버린 수많은 삶을, 그 누가 배상해 줄 수 있을까.


1980년 5월 27일 최후의 항전으로부터 44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이들 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소리도 소문도 비명도 남김없이 떠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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