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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2. 2020

1980년 5월,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

그해 서울의 봄은 짧았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서울은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쳤던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시기이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쟁의가 터져 나와 무려 897건에 달하였고, 신규 노동조합들의 깃발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대학가가 열리자 각 대학에 총학생회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광주에 위치하던 전남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전남대는 1970년대 이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었다. 1971년 광주일고 출신들이 전남대에 만든 이념 서클 '민족사회연구소'의 교련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독재에 저항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에는 반(反) 유신 시위를 준비하던 전남대학교 재학생 18명이 구속되었다. 이듬해 문교부는 각 대학 총학생회를 폐지하고, 학원병영화 조직인 학도호국단 부활을 발표했다. 1970년대 후반, 전남대 학생사회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박정희 군사교육에 반발하여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날, 이들은 모두 중앙정보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도 양심적인 교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이 끌려갔음에 분노했다. 곧 수백 명의 학생들이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시위를 진행했다. 다음날, 이들은 거리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전남대학교 재학생 14명과 조선대학교 재학생 4명이 구속되었다. 이중 전남대 재학생 10명은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 사건으로 제적생이 된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박기순과 신영일은 소외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노동 야학(夜學)을 만들기로 했고, '들불야학'을 만들었다.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강의실로 활용했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광천동에 위치한 광주공단 노동실태를 알기 위한 실태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때 실태조사반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전남대 재학생들이 참여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법대생 박관현이 합류했고, 전대학보사 (현 전대신문) 안진 기자는 아예 학보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 이들은 밤낮으로 노동자들을 만나 추합 한 299장의 설문지를 분석했고, 걸출한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상원은 박관현에게 들불야학 합류를 제안했다.


 1980년, 유신 시기에 제적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학기 초부터 군부 독재에 굴종했던 어용교수들에 대한 학내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일부 학생들은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며 학원민주화를 요구했다. 노동 실태를 직시하는 것으로 공부에 회의감을 느꼈던 박관현은 고심 끝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부활에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절친 양강섭을 만나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양강섭은 7월까지만 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이를 수락했다. 부총학생회장으로는 공과대학의 이승룡이 합류했다. 곧 인문대학 정선자 후보를 비롯한 단과대학 러닝메이트도 생겨났다.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402호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방은 선거캠프가 되었다. 선본명은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였다. 박관현은 헝클어진 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윤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했다. 신뢰감을 주기 위해 양복을 맞추는 것도 도왔다. 그해 4월, 박관현은 60%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박정희에 의해 문을 닫았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한편,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되었던 김운기가 학교로 돌아온 직후부터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그와 함께 반(反)유신 활동을 했던 양희승, 유재도 등이 합류했다. 이들 역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활동에 나섰다. 그해 오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는 함께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5월 2일,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최대 규모로 진행된 비상학생총회장에 모인 학생들은 ‘유신철폐’, ‘계엄해제’ 등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결의했다. 5월 9일에는 전국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망을 논의했다. 이들은 5월 14일을 기해 일제히 거리로 진출하여 집회를 진행했다. 이때 서울역을 중심으로 이틀에 걸쳐 이어진 시위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하여 민주화 일정 진행을 촉구했다. 5월 15일,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운동가들은 향후 진행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각 정당들이 5월 20일 임시 국회를 개원하고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합의한 상황이었다. 학생 대표자들은 군부를 더 이상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온건파와 시위를 계속해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뉘어 논쟁을 이어갔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온건파를 대표했고, 서울대학교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이 강경파를 대변했다.


 긴 토론의 결과, 국회가 임시국회를 통해 계엄 해제를 합의했으니 더 이상 군부를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이들은 논쟁 끝에 가두시위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일명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 대표자들은 시위를 중단하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만약 군부가 움직임을 보이면 다음날 아침에 각 대학교 정문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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