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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2. 2020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태동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운동'의 시작

 전남대학교는 1970년대 이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었다. 1971년 광주일고 출신들이 만든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학생운동이 시작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에는 전국 동시 다발 반(反)유신 시위를 준비하던 전남대학교 재학생 18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듬해 문교부는 각 대학 총학생회를 폐지하고, 학원병영화 조직인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켰다.


 1970년대 후반에 전남대학교 학생사회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박정희 군사교육에 반발하여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날, 이들은 모두 중앙정보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도 양심적인 교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이 끌려갔음에 분노했다. 곧 수백명의 학생들이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시위를 했다. 다음날에는 거리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진행했고 전남대학교 학생 14명과 조선대학교 학생 4명이 구속됐다. 전남대학교 재학생 10명은 학교에서 제적됐다. 이 사건으로 제적생이 된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박기순과 신영일은 소외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노동야학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곧 '들불야학'을 만들었다.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을 빌려 운영을 시작했고, 곧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광천동에 위치한 광주공단 노동실태를 알기 위한 실태조사도 진행했다. 이때 실태조사반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법대생 박관현이 합류했고, 전대학보사(현 전대신문) 안진 기자는 학보사를 떼려치고 합류했다. 이들은 밤낮으로 노동자들을 만나 299장의 설문지를 분석해 내었고, 걸출한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상원은 박관현에게 들불야학 합류를 제안했다. 


 1980년, 박정희 사후 제적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군부독재에 굴종했던 어용교수들에 대한 학내 반발이 거셌고, 일부 학생들은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며 학원민주화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실태를 배우고 공부에 회의감을 느꼈던 박관현은 고심 끝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부활에 앞장서야 겠다고 생각하고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절친 양강섭을 만나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양강섭은 7월까지만 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이를 수락했다. 부총학생회장으로는 공과대학의 이승룡을 설득했다. 인문대학 정선자 후보 등 단과대학 러닝메이트도 생겨났다.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402호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방은 곧 선거캠프로 변모했다. 선본명은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였다. 박관현은 헝클어진 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윤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해주었다. 신뢰감을 주기 위해 양복을 맞추는 것도 도왔다. 그해 4월, 박관현은 60%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이로써 박정희에 의해 문을 닫았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한편,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되었던 김운기가 학교로 돌아온 직후 부터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건설에 돌입했다. 함께 반(反)유신 활동을 했던 양희승, 유재도 등도 합류했다. 이들 역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활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는 곧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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