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도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노동조합과 총학생회가 결성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민주 일정 속행’을 주장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14일을 기해 전남대 정문을 넘어 거리로 진출,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양심적 교수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전남도청까지 행진했다. 일명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는 사건이다. 학생들의 평화적인 행진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했다. 다음날인 5월 15일에도 행진이 이어졌다. 이때 광주 지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로케트건전지 노동조합을 결성한 여성노동자 1,800명은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개최한 후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서 빵과 우유를 전달했다. 그날 집회의 사회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양강섭 총무부장이 맡았다. 그의 소개를 받고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수많은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는 이 나라에! 인간 노릇을 못하고 노예와 같이 굴종 거리며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 이제는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최선을 그르칠 수 없어서 다 같이 동참하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의 연설은 여전히 많은 광주시민들에게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전남대 총학생회는 시위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직후,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시위 잠정 중단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광주 지역 학생들은 이대로 시위를 끝낼 수 없었다. 이들은 고심 끝에 5월 16일에도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지난 이틀간 있었던 시위보다 더 파격적인 '야간 횃불집회'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기로 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당시 전라남도 경찰의 총책임자였던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을 만나 야간 횃불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1980년 5월 16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횃불시위를 진행했다. 광주 경찰들이 이들의 집회를 보호했다. 불과 이틀 후부터 광주가 겪게 될 참극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5·16 화형식'을 진행했다. 마지막 집회가 횃불집회로 진행된 것은, 밤하늘을 밝히는 횃불과 같이 명명백백하게 나아갈 길을 밝히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날의 횃불집회를 끝으로 3일 간 이어진 민족민주화성회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