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시민들의 바람과 달리 신군부는 끝내 민중들의 저항을 짓밟고 권력을 찬탈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했다. 신군부 측 인사들은 박정희 사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어 있던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의견은 묵살되었다. 이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장을 포위한 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프라하의 봄처럼 짧게 끝났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95개 대학에 특전사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신군부는 허황된 ‘新남침설’ 등을 주장해 왔으나 군대는 그들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곳들을 향했다. 5월 17일 저녁 무렵이 되자 군부는 미리 점찍어둔 민주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최종적으로 2,699명의 민주 인사를 체포했다.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과 이해찬, 유시민, 심재철, 문재인, 김상윤, 정동년 등 민주주의와 관련된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은 모두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군부는 이화여대에 모여있던 전국 총학생회 대표단 회의장에도 난입했다.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빠르게 전국 각지에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알렸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에도 “군인들이 회의장에 왔다 너희도 어서 피하라”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광주 계림동 대지호텔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대책을 고심했다. 1970년대 광주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 윤한봉은 문병란 시인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구속을 피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상윤은 녹두서점에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박형선, 정동년과 같은 옛 전남대 학생운동 주동자들도 속속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5월 18일 새벽 1시경 박관현은 총학생회실에 남은 인원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양강섭 총무부장을 전남대로 보냈다. 그러나 양강섭이 총학생회장실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 33대대였다. 총학생회실에 남아있던 인원들은 서둘러 두 갈래 길로 피신을 시도했다. 양강섭 총무부장 등 3명은 중앙도서관을 거쳐 상과대학 쪽으로 피신했다. 이승룡 부총학생회장, 권창수, 오진수 등 4명은 공대 쪽문을 거쳐 피신하고자 했으나, 퇴로가 막혀 공대 5호관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3시,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남대에 왔다. 군인들은 이미 학교를 점령한 후 도서관 등에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끌어내 기합을 주고 있었다. 이들은 학생들을 마구 폭행했다. 학교 수위가 박관현에게 도망치라고 눈치를 주었다. 남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수 돌산도까지 피신했다. 불과 몇 시간 후 5·18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었다.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양희승, 김운기, 유재도, 유소영 등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로써 광주 지역 주요 사회운동가들은 대부분 검거되거나, 몸을 숨겨야 했다. 광주에는 시위를 주동할만한 사회운동가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불과 몇 시간 후에 일어나는 시위는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