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점
1980년 5월 18일 새벽, 특전사가 광주에 왔다. 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학교를 35대대는 조선대학교를 점령했다. 이들은 착검한 M-16 소총과 곤봉을 들고 학교 건물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다짜고짜 구타하기 시작했다. 곧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온 60여 명의 학생들이 기합을 받기 시작했다. 특전사 군인들의 폭력의 정도는 전북대학교 재학생 이세종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월 18일 새벽, 착검한 M-16 소총과 곤봉을 들고 전북대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고, 간부들을 피신시키려 했던 이세종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생명에 잃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 추락사’로 은폐되었으나, 훗날 온몸에서 발견된 타박상을 근거로 그 진상이 밝혀졌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전남대학교 정문을 사이에 두고 군인들과 학생들의 대치가 시작됐다. 군부는 민주인사들을 체포함에 따라 시민들이 침묵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오히려 평범한 시민들이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여들기 시작한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군인들에게 항의하며 자연스레 '비상계엄 해제', '민주 일정 진행'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완전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했다. 투석전이 벌어졌지만,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30분, 분노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를 벗어나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거리까지 행진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 전남대 학생들이 금남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은 광주 시내에 해당하는 금남로 한복판이었다. 곧 완전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금남로에 도착했고, 곤봉을 들고 차량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기 시작했다. 군인이 철심이 박힌 곤봉을 휘두르면, 맞은 사람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이들은 젊은 사람만 보면 곤봉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했습니다. 보다 못해 이에 항의한 노인도 계엄군의 곤봉에 쓰러졌다. 금남로 거리는 삽시간에 피의 바다가 되었다.
1980년 광주 가톨릭센터 6층에는 대주교의 집무실이 있었다. 당시 광주 가톨릭의 지도자였던 윤공희 대주교, 조비오 신부, 김성용 신부는 창문을 통해 계엄군이 학생들을 때리는 장면을 지켜봤다. "젊은 학생들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있는데, 내려가서 도와줄 용기가 없어 부끄러웠다", "총이 있었다면 나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훗날 그들이 남긴 증언이다. 가톨릭 사제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이날 군부는 시위 진압 명분으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왔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금남로에 왔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의 죽음은 계엄군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증언하고 있다. 5월 18일, 금남로에 나와있던 김경철은 계엄군의 폭행에 의해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당시 계엄군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을 보는 즉시 곤봉을 휘둘렀다. 김경철은 폭행하는 계엄군에게 자신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손짓했지만, 계엄군은 심한 욕을 하며 더욱 세차게 곤봉을 휘둘렀다. 결국 다음날 새벽 3시경, 김경철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첫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그에게는 갓 돌을 넘긴 딸이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이날 하루 동안 68명의 시민들이 두부외상, 타박상, 대검에 의한 자상 등을 얻었으며 12명은 중상을 입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학생들이 군인들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