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9일, 학생시위는 민중항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전날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은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고 외치며 거리로 모여들었다. 군인들은 모여든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고 체포했다. 이들은 시위 참여자들을 옷을 벗긴 상태에서 폭행했고, 심지어는 대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어떤 군인이 다친 학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택시에 태우던 택시기사를 대검으로 찌른 일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날 공수부대는 최초의 발포를 했다.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 인근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당하자, 한 장교가 M-16 소총을 발포했고 광주고 3학년 김영찬이 총상을 입었다.
계엄군은 광주 시민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던 YWCA에도 난입했다. 이들은 무장한 상태로 YWCA에 들어왔다. 당시 YWCA는 신용협동조합, 양서협동조합, 국제앰네스티 광주본부 등이 함께 사무공간으로 사용하는 등 광주 시민사회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9일 12시경, YWCA 금남로 사무실에는 들불야학 강학이기도 했던 김영철, 박용준과 양서협동조합 황일봉이 있었다. YWCA에 난입한 군인들은 황일봉을 끌어내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학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YWCA 건너편에 있던 무등고시학원 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려도 되는가" 군인들의 야만에 분노한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며 때리지 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즉시 무등고시학원으로 달려왔다. 학원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폭행했다. 밖에 있던 군인들은 학원 건물 셔터를 기어서만 나올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렸다. 학생들은 곤봉을 피해 학원을 기어서 빠져나왔고, 군인들은 그들이 학원을 나오는 즉시 곤봉으로 폭행했다.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폭행하는 광경을 지켜본 고등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에는 1964년 6·3 항쟁을 주도했던 1세대 전남대 학생운동가 박석무가 대동고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박석무는 윤한봉의 둘째형이자 대동고 동료 교사였던 윤광장, 마찬가지로 대동고 동료 교사인 박행삼 등과 함께 교사모임을 만들어 활동 중이었다. 여기에는 중앙여고, 전남고, 광주여상 교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5월 19일, 박행삼은 단단히 각오하고 수업에 임했다.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출석부터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 어떤 말도 해서는 안되고, 들어서도 안되었다. 그때 한 학생이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지금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는데 수업을 꼭 하셔야만 하겠습니까?" 학생의 질문에 박행삼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고,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다. 곧 대동고 학생들은 학내 시위를 시작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교실을 뛰쳐나와 운동장에 모였다. 학내에 구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박행삼과 윤광장은 이들을 만류했다. 두 사람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호소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만류하는 광경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한편, 그날 광주일고와 중앙여고 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에서 집회를 진행했다. 중앙여고는 1975년 '겨울공화국'이라는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직된 양성우 교사의 학교였다. 곧전남도교육청이 광주 소재 초, 중, 고등학교 임시휴교를 발표했다. 고등학생들은 학내 시위를 마친 후 삼삼오오 금남로로 이동하여 시위에 합류했다. 계엄군은 광주일고 앞에 위치하던 광주공과기술학원에 난입하여 40여 명의 학생 및 강사들을 옷을 벗긴 상태로폭행했다. 시위가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오후 5시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평범한 시민 김안부는 광주공원 근처에 위치하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그는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만복에 의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전날 군인들의 곤봉에 맞고 쓰러진 후 19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난 김경철에 이어,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1980년 5월 19일, 김경철, 김안부 두 사람의 광주시민이 국가의 군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사람은 군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자상을 입었다.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군인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가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5월 19일 밤, 육군본부는 시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3공수여단을 광주로 증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