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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2. 2020

1979년 겨울, 12.12 군사반란

군내 사조직의 권력 찬탈

 1980년, 5.18이 우리에게 왔다.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는 일제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분단, 동족상잔 전쟁과 학살을 통해 시민들에게 무력함과 순응을 가르쳐왔다. 전후 30년간 두 사람의 독재자가 국가를 지배했다. 야만의 시대였다.


 박정희는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을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린 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쳤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대외 의존적 성장이었다. 특히 노동자의 임금을 억압함과 동시에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 3권을 원천 봉쇄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을 발표하여 제4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보통 선거를 완전히 폐지하고 체육관 선거를 확립했다.


 1979년은 박정희 집권 18년 차였다. 그해 중순부터 그간 쌓여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YH무역 사건


 1979년 3월 29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윤을 축적해온 가발회사 YH무역이 폐업을 공고했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노동조합과 함께 회사 측에 맞섰다. 그러나 그해 8월 6일, 사측은 폐업을 확정했다. YH무역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도움을 요청했고, 8월 9일부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8월 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농성을 강제 해산하고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노동조합 집행위원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의원들도 뺨을 맞는 등의 폭행을 당했다. 


 분노한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부산 마산 항쟁


 1979년 10월 4일, 여당 의원들이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빌미로 '국회의원 김영삼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10월 13일, 김영삼 의원 제명에 반발하여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10월 15일에는 분노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에 나와 시위를 진행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부산대, 동아대에 이어 마산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을 기점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특전사를 투입했다. 여기에는 불과 7개월 후, 광주를 피로 물들이는 3공수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동자 유치준이 사망했다. 나흘 간의 시위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1,563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는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10·26 사태


 칠흑과 같이 어둡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난데없이 자신의 부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당시 술자리에는 김계원 비서실장도 동석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 사건 최후진술에서 자신이 총을 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날 술자리에서 불과 1주일 전에 발생한 부마항쟁에 대한 대처를 놓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200~300만 명을 죽였는데 여차하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4.19 당시에는 최인규나 곽영주 같은 장관들이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를 명령하면 누가 나를 사형시키겠나”라고 동조하는 것을 듣고 암살을 실행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이어왔던 독재자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다.


12·12 군사반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날인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계엄 정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0·26 사태 직후 한국 사회의 중앙 권력에는 큰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대통령과 함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주요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에 온전히 권력을 유지하던 군부의 실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두환의 배후에는 ‘하나회’라고 불리는 군내 사조직이 존재했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 이후 기수 출신 군 장교들의 모임이었다. 육사 11기는 1951년 육사에 입학하여 1955년 졸업한 이들로,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 장교들 중 처음으로 4년제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군 장교가 되었다. 이들은 첫 4년제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특유의 엘리트 의식을 형성하였으며, 군내 사조직을 형성하여 군부의 상층부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권력의 공백을 틈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육군본부를 점령했다. 반란 과정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비롯한 군인들이 무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조선대학교 재학 중, 일반 사병으로 군대에 입대했던 정선엽 병장 역시 불과 5개월 뒤 그의 고향을 피로 물들게 하는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들은 반란 과정에서 휴전선에 주둔하던 병력까지 동원했다.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내 대항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 소속 반란군인들은 가히 창군 이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반란수괴', '내란목적살인', '내란주요임무종사', '상관살해', '초병살해', '불법진퇴' 등 군 형법상 가장 무겁고 엄중한 범죄들이 자행되었다. 이로써 이들 '신군부'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반란수괴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0년 2월 25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8월 5일에는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스스로 별을 두 개나 주워단 셈이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 차근차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민들은 18년간 장기집권을 이어온 독재의 공백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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