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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23. 2019

5.18 민중항쟁 전사(前史),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① ~ ⑳ (1971~1979)

 본 글은 1980년 5·18 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이전 10년의 역사를 광주 지역 사회운동의 흐름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에는 그 어떤 창조도 없으며, 이미 수많은 분들께서 기록하고, 남겨둔 것들을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참고문헌들에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목차.


0. 시작하며.

(2020년)


1.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上

(1972년)


2.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下

(1973년)


3. 1970년대 초반, 광주 운동세력의 맥이 형성되다 

(1971년)


4. 1970년대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 上 

(1974년)


5. 1970년대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 下

(1975년)


6. 민청학련 세력, 광주에 자리 잡다

(1975년)


7.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과 부활절 사건 

(1976년)


8. 겨울공화국 필화사건, 표현의 자유를 짓밟다

(1975년~1977년)


9. 1977년 여름 김상윤, 녹두서점을 열다 

(1977년)


10. 윤한봉 박정희 암살을 고민하다 

(1977년)


11. 농민운동의 효시, 함평 고구마 사건 

(1978년)


12.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1978년)


13. 1978년 여름, 들불야학의 탄생 

(1978년)


14. 박기순, 세상을 떠나다 

(1978년)


15. 광주 여성운동의 뿌리 송백회와 삼봉조합의 형성 

(1978년)


16. 1979년, 광주 사회운동 역량의 고조 

(1979년)


17. 박관현과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1979년)


18.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1979년)


19.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1979년)


20. 광주서부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박정희의 죽음 

(1979년)


 0. 시작하며.

 

 5·18에 대해 쓰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 1980년 5월 그날, 아버지는 시민군 버스에 올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돌을 옮겼다고 한다. 그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1991년 조선대학교 총동아리연합회장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집회 현장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았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시작된 붉은 선혈은 발목까지 이어졌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사경을 헤맸다. 그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1996년 10월, 내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역사를 처음 인지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5·18의 사진들을 보게 된 날의 기억이다. 사진을 본 장소가 전남대학교였는지, 망월동 묘역이었는지는 흐릿하지만, 나는 우연히 그날의 사진들을 보았다. 군인들이 곤봉으로 시민을 때리고 있는 장면, 대검을 장착한 군인이 시민을 쫓아가는 장면, 군인이 M-16 소총을 시민을 향해 겨누고 있는 장면, 그리고 도저히 말과 글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모습으로 살해당한 시민들의 모습. 나는 그날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된 것처럼 깊은 마음의 상흔을 입었다.  시절 나에게 광주는 아픔이었고 소외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광주의 붉은 빛깔을 돌아본 건 2014년의 일이다. 그해 나는 다시금 광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을 끝내 은폐하려는 모욕과 비방의 칼날이 광주를 겨누고 있었다.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아들이 누워있는 관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홍어 택배'로 희화화되었다. 나는 깊이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2014년 5월 9일, 나는 페이스북에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라는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활동가로서 살아왔다. 정당,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의 시작은 언제나 '광주'였다. 처음에는 막연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오월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5년의 시간이 오월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었다. 오월은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픈 일이었지만, 그 도시에서 열흘간 있었던 일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위대한 이유는 아픔에 있지 않았다. 그날, 광주에는 아픔을 넘어서는 긍지와 주체성이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도청에 남은 윤상원 열사는 청소년분들께 집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겁니다. 여러분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이 싸워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라 신뢰했다. 윤상원 열사가 부탁했던 그 내일, 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방식 중 하나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여러 5·18 당사자를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5·18 기록물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당시 추진단장을 맡았던 안종철 박사님과 함께 관련자분들을 모시고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해당 방송에는 5·18 관련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청항쟁지도부 박남선 상황실장, 5·18 당시 마지막 방송 진행자 박영순, 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광주를 겪었던 안성례 전 광주시의원, 오월 어머니집 노영숙 관장,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저자 전용호, 녹두서점의 정현애, 김상집과 같은 광주의 당사자들이 출연했다.


 이제 스스로의 관점으로 오월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광주에 대해 쓰고 그날의 사람들에 대해 쓸 생각이다. 상당히 객관적 사실 위주의 글을 쓰겠지만, 시작하기에 앞서 글쓰기를 시작하는 이유를 밝혀둔다.


 우선 1980년 이전 10년 간의 역사에 대해 먼저 쓰고자 한다. 1980년은 그냥 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5·18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다.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上

1.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上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국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일명 '유신쿠데타'다. 불과 10일 뒤, 유신헌법이 기존의 헌법을 대체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었고 대통령 연임 제한도 사라졌다.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임기 6년의 대통령에게는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권한이 주어졌다. 이로써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군홧발이 양심을 억누르던 추운 겨울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광주에서 터져 나왔다.


 1972년 12월 9일, 지난 두 달간 휴교 상태였던 전남대학교는 개강 준비로 분주했다. 유신쿠데타 직후 휴교한 대학들이 12월 10일 동시 개학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날 밤, 광주 일대에 유신체제를 맹렬히 비판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유인물의 이름은 '함성지', 주동자는 전남대학교 재학생 이강과 김남주였다. 두 사람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해남중학교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다. 그해 8월, 학점 문제로 고민하던 김남주는 이강에게 "부모님께 위조 졸업장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해남 본가로 내려가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10·17 비상조치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한 김남주는 격노했다. 다음날 오전 광주 동구 산수동에 위치한 이강의 자취방에 김남주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남주는 곡괭이를 집어던지고 광주로 올라왔다.


 그날 두 사람은 역사의 앞날에 대해 밤새 이야기했다. 밤이 이슥한 것도 잊은 채 마음속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정읍행 버스에 탔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은 역사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들이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농민군 첫 전승지 '백산'에 오른 이강은 "이렇게 낮은 봉우리가 혁명군 첫 전승지"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김남주는 황토재 벌판을 지키고 있는 '동학혁명기념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훗날 그가 발표하게 되는 시 '죽창가'는 이날 그 생명력을 얻었을 것이다. "이 들판은 날아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그날 밤, 두 사람은 유신독재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 방법론으로 유신독재 규탄을 골자로 '함성지'라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광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지를 돌며 인쇄용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프린터로 간단히 인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등사기'를 통한 작업이 필요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장소에서 원지를 긁은 줄판을 밀어야 했고, 100여 장을 복사하고 나면 새롭게 글을 적어야 했다. 500장을 복사하려면 원고 5부가 필요한 셈이다. 이강은 등사기용 줄판을 구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활동가 박석무 (당시 북성중 교사)를 찾아가 "중고생 학습지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며 줄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박석무는 "혹여나 유인물을 제작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으며, 1년 전인 1971년에는 '녹두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결국 이강은 양동시장에서 줄판을 구매하였고 '함성지' 인쇄를 시작했다. 글의 초안은 김남주가 대부분 작성했고 이강도 글을 보탰다. 인쇄비용 마련을 위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하니 김남주의 영문과 동기 이경순과 강희순이 차고 있던 반지까지 빼서 힘을 주었다. 이경순은 훗날 전남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2016년에 정년을 맞이했다. '함성지' 인쇄에는 이강의 자취방에 함께 살던 여동생 이정과 남동생 이황, 집안 조카 이정호도 함께 했다. 필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전남대 학생인 이강과 김남주의 필체로 인쇄하면 시험지 조회를 통해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이강의 여동생 이정은 또 다른 남동생 이연과 함께 5·18을 맞이했으며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에 참여했다. 막내 이윤은 이한열 열사의 친구로 6월 항쟁에 가담했으며, 1987년 대선 당시 구로을 투표함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당대의 사회운동에 매우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이 합류하게 되는 건,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2월 초입, 우여곡절 끝에 '함성지' 인쇄가 완료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눈과 귀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자학과 어두움 속에 허탈에 빠진 언론, 문화인, 청년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아쉽게도 함성지 원문은 남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법원 판결문 일부를 발췌함)


 이강과 김남주는 개학 전날인 12월 9일을 기해 함성지를 일제히 배포했다. 밤 10시경 전남대 농대, 상대, 문리대, 공대에 250여 장의 유인물을 뿌렸다. 이어 광주공고, 광주고, 전남여고, 광주일고까지 고등학교에도 유인물을 배포했다. 남은 유인물을 조선대에 뿌리려 했지만 12시 통금시간 때문에 100여 장을 남긴 채 귀가했다. 다음날, 전남대학교는 물론이고 광주가 발칵 뒤집혔다. 정보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경찰들이 각지에서 유인물을 수거했다. 등교한 이강은 전남대 활동가 김정길을 만났다. 김정길이 은밀한 제스처를 취하며 "오늘 오전에 오다가 주웠다"며 함성지를 꺼내 들었다. 이강은 시치미를 뚝 떼며 "나도 한 장 줄란가?" 물었으나 몇 개 없다며 거절당했다.


 한편, 박석무는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의 부름을 받고 학생처장실에 갔다. 그 자리에는 신원미상의 중앙정보부 요원이 있었다.


2.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下


 1972년 12월 10일, 박석무는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을 만났다. 정득규는 함성지를 유포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느냐 물었다. 박석무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 답한 후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무관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김정길, 김남주, 고재득, 송정민, 모두 당대의 전남대학교 활동가들이었다. 박석무는 함성지를 이강의 단독 소행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이강과 김남주는 대인시장 한성다방에서 만났다. 이강은 이날 김남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줄담배를 태웠다고 술회한다. 며칠 뒤부터 김남주는 광주를 떠나 서울에 살던 광주일고 동창 이개석의 집에 머물렀다. 함성지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첫 번째 반발로 남게 되었다.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첫 체육관 선거가 12월 23일로 예정되어 있던 시점이었다. 당국은 함성지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다. 사건은 일시적인 미제사건이 되었다.


 1973년 3월, 이강은 제2의 함성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 학기를 맞아 전국적인 반유신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유인물을 전국 대학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김남주에게서 "너무 춥다. 이불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강은 김남주에게 자신의 계획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어 '고발지'라는 이름의 글을 작성한 후 동생 이황과 함께 500장을 인쇄했다. 김남주에게 보낼 이불속에 인쇄용품, 고발지 500장도 끼워 넣었다. 미처 배포하지 못한 함성지 100여 장도 넣었다. 이강은 해당 물품을 이개석의 자취방에 택배로 보냈다. 당대에는 '화물소'를 통해 물건을 보냈다. 고발지 역시 함성지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4.19 혁명의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자유의 적에 대하여는 끝까지 항거하고 피로써 투쟁하는 육신으로 혁명할 것을 선언한다. 제4 공화국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특권층, 단 한 번의 민중봉기로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그러나 경찰은 김남주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강이 김남주에게 보낸 편지를 포착했고, 이불 등의 수하물도 당국에게 적발되었다. 1973년 3월 20일, 이강은 전남도경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박석무와 김남주도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어 이강의 동생 이정, 이황, 애인 이재은, 집안 조카 이정호, 김정길, 김용래, 이평의, 윤영훈, 이개석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김남주에게 반지를 주었던 이경순과 강희순, 김남주의 동생 김덕종도 전남도경으로 끌려왔다. 총 15명이었다. 이들은 전남대 활동가이거나 이강의 지인이었다. 박석무는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6.3 운동 이후 선배 그룹 활동가였다는 이유로 '수괴'로 지목되었다.


 '함성-고발지 사건' 관련자 15명 중 9명 (이강, 박석무, 김남주, 이황, 이정호, 김정길, 김용래, 이평의, 윤영훈)은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다른 6명 (이경순, 강희순, 이정, 이개석, 김덕종, 이재은)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러온 사람들에게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은 학내 서클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교양독서회 (김정길), 삼민회 (김용래), 그린트리 (이정호) 등의 교내 서클들은 1973년 3월 말 4월 초 반유신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함성-고발지 사건이 발각되지 않았다면, 전국 최초의 반유신 시위가 전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체포된 9명의 구속자들은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15명의 관련자는 4월 19일 자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의 유인물 유포가 국가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라는 궤변의 시대였다. 이들은 한동안 광주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어야 했다. 1심 재판 결과 검사는 박석무,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1973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은 박석무, 김남주에게 징역 2년, 이강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수괴'보다 소속원이 더 큰 처벌을 받은 황당한 판결이었다. 다른 구속자들은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의 눈부신 활약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함석헌 선생이 내려와 재판을 2번 방청했으며 국제앰네스티 동경지부에서 영치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1심 판결 이후 법정은 토론장으로 변했다. 12명의 불구속 피고인들과 3명의 구속자들이 열띤 논변을 펼쳤다. 박석무가 "재판이 흥미로웠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구속자들은 진술과정에서 고문 피해가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고문경찰들은 당혹한 표정을 감추며 "아들, 딸 같아 잘해줬지 고문한 적은 없다"고 진술했다. 고문 행위는 엄연한 국가폭력이지만, 이 시대의 법정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1973년 12월 27일, 항소심 재판부는 박석무에게 무죄를, 이강, 김남주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석방되었으며, 소식을 들은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이들을 환영했다.


 동아일보에 짧게 실린 세 사람이 환영받는 사진은 '함성지 사건'에 대한 첫 언론보도였다. 법정에서 대한민국을 대리하는 검사에 따르면, 15명의 청년들이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대한민국 체제전복을 시도했다는 사건이 완벽히 은폐되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불과 두 달만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은 끝내 은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함성지 사건'을 계기로 광주의 저항세력도 규합되기 시작했다.


 2019년 11월 7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오월 전사 (前史) 이야기 마당'에 이강 선생이 대담자로 참여했다. 그에게서 함성지 사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197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그의 이야기를 2019년에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상당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며칠 뒤인 11월 15일, 필자는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뒤편에 '홍콩 시위' 지지를 표명하는 현수막과 대자보를 게시했다. 홍콩 시민들이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 보고 듣고 배워온 광주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연대의 의미를 담아 현수막과 대자보를 게시했다. 이제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는 '김남주 기념홀'이 위치한다. 그날 현수막을 게시하며 이강과 김남주,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받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두 사람을 계승하는 사람들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날 것이다. 역사의 필연이다.


3. 1970년대 초반, 광주 운동세력의 맥이 형성되다.


 엄혹했던 1970년대, 독재정권은 시민들의 삶을 차츰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군대의 억압이 사회를 휘감고 있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러나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선포하자 이강과 김남주는 "독재자의 복마전(소굴)을 향해 총궐기 하자!"며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그즈음 광주에는 독재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바꿀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4.19 혁명, 6.3 한일협정 반대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금 더 본격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특히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이 같은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1970년대 초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한 건 1971년에 설립된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민사련)'이었다. 민사련의 주축은 당대 호남 최고의 명문이었던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14기 졸업생들이다. 정상용(법학 71), 이양현(사학 71), 김정길(경영 71), 문덕희(수의학 71), 박형선(축산 71) 등이 주축이 되었다. 민사련은 전남대학교 역사상 첫 사회과학 서클로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광주일고 졸업생으로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윤한봉은 광주일고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광주일고 교정에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있어요. 일고생들 이 탑을 긍지로 알지. 광주 학생운동의 본거지라는 거여. 그런 곳인데 그 역사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누가 한번 학문적 접근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 수량화할 수 없는 엄청난 거예요.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학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일제하에도 독서그룹이 있어가지고."


 1929년, 3·1운동 이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만주까지 확산되었다. 그해 11월 3일, 분노한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明治)절 행사장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다. 광주여고보 일부 학생들도 합류했다. 이후 조선 팔도 198개 학교 5만 4천 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해방 직후, 광주고보는 광주일고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교정에 세워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광주에 끼친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박형선의 여동생이자 들불야학 창립자 박기순은 전남여고(광주여고보 후신) 재학 시절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여학도 기념비'를 보고 교지에 글을 남겼다. "우리 어찌 잊으리 조국의 자유 외치던 언니들의 외침을! 학생운동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전남여고와 더불어 그대(기념비)는 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그 시절 광주일고에는 이념서클 '피닉스'와 '광랑 光郞'이 있었다. 광주고에는 박석무가 한때 참여했던 '녹번'이 있었다. 이중 광랑 출신들은 전남대학교에 학생운동을 이식했다. 일제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용근이 광주일고 교사로 학생들에게 큰 영향끼쳤다. 문병란 시인도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모임을 진행했다. 최병근 교사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학내에 배포했다. 1973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을 확산시킬 것을 우려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기념일 목록에서 학생의 날을 삭제했다.


 1971년, 윤한봉이 전남대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다. 그는 1970년대 광주의 사회운동을 설명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윤한봉은 광주일고를 졸업한 후 한동안 방황했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최전방인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 주둔하는 12사단에서 군생활을 했다. 원래 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군 복무는 김신조 일행의 박정희 암살 시도 (1.21 사태)로 6개월 연장되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만학도로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윤한봉은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유명한 모범생이 되어 A학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학내 구성원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1971년 10월, 민족사회연구소가 송정민(영문 68)이 주도하던 학내 서클 'ACR'과 함께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를 열었다. 전남대학교 본관 건물 앞이었다. 학생들이 모였고 주동자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한봉은 우연히 시위를 목격하게 되었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깊은 울림을 받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경찰의 출동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민족사회연구소 주요 구성원들은 이 사건으로 강제 징집당했다. 이후 민족사회연구소는 '교양독서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교양독서회의 회원으로는 유선규(수학교육 72), 이훈우(경제 73), 오국영(사학 72), 오재일(법학 72), 박형선, 문덕희, 김정길 등이 있었다.


 1년 뒤인 1972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윤한봉은 유신쿠데타를 접한 직후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다.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 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 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 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 된 거지"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윤한봉은 10월 유신을 계기로 활동가의 삶을 다짐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다짐을 지켰다. 그는 곧 농대 활동가 박형선과 문덕희를 만나 교양독서회에 합류했다. 윤한봉은 고심 끝에 자신의 첫 활동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바로 '학생회장 선거'였다. 그는 신뢰하던 지인이었던 민상홍을 설득해 농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했다. 민상홍은 농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윤한봉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초반, 광주 사회운동의 맥이 형성되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교양독서회와 농과대학 학생회가 주축이었다. 1971년, 6.3 한일협정 반대운동 세대인 박석무와 함께 반유신 유인물 '녹두지'를 배포하기도 했던 송정민의 ACR(analysis, criticism, research), 삼민회(김용래 주도), 그린트리(이정호 주도) 등의 그룹도 함께 했다. 이학영(국문 71), 김현장(조선대 금속공학 71), 윤강옥(사학 71), (박석무와 자주 교류했으며 걸출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있던) 김상윤(국문 68) 등의 학내 활동가들도 다각도로 교류했다. 이강과 김남주의 '함성-고발지' 사건으로 교양독서회, 삼민회, 그린트리의 공동 반유신 학내 집회 계획이 무산되고 구성원들이 구속되는 사태도 발생했지만 이들은 1974년 초까지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여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4. 1970년대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 上


 1973년 10월 2일, 박정희 유신쿠데타에 대한 첫 집단적 반발이 터져 나왔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생회가 교정에 위치한 4.19 기념탑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법과대학을 향해 행진했다. 그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분연히 일어섰다. 이내 경찰이 출동했고 180명의 학생들이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법과대학과 상과대학도 연이어 시위에 나섰다. 경북대, 서강대, 이화여대의 대학생들도 독재타도를 외치며 궐기했다.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신일고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로부터 한 달 전, 전남대학교에서도 반 유신 시위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주동자였던 윤한봉과 박형선이 시위를 앞두고 각각 화엄사와 송광사 근방 여관에 연금되어 버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따른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해당 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인권의 원칙 '영장주의'를 짓밟아버렸다. 유신체제에 반대하거나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것만으로 군사재판을 받고 구속될 수 있는 무서운 조치였다. 헌법을 짓밟은 독재세력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주장을 '헌법 반대'로 규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전국 대학생들은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주도할 필요성을 느꼈다. 거기에는 4.19혁명 당시의 전국적인 시위 경험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김정길에게 서울 활동가 나병식이 찾아왔다. 나병식은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시위 주동자였다. 그는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김정길은 나병식에게 윤한봉을 소개해주었다. 윤한봉은 서울에서 온 이철, 나병식, 황인성을 만났고 함께 유신에 대항하자고 뜻을 모았다. 윤한봉은 호남 지역 담당자가 되었다.


 윤한봉은 김상윤(국문 68)을 만나 전남대학교 학내 반유신 시위를 제안했다. 당시 학내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론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맡고 있던 김상윤은 함께 시위를 실행할 주체들을 발굴했다. 윤강옥(사학 71), 이학영(국문 71), 김정길(경영 71), 문덕희(수의학 71), 박형선(축산 71), 유선규(수학교육 72), 최철(농업경제 71) 등이 위 준비에 합류했다. 윤강옥이 삼고초려 끝에 포섭한 이훈우, 하태수 등의 새로운 멤버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일정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선언문 배포를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강령을 비롯한 조직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민청학련은 전국 단위 시위를 준비하는 임의단체로 조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던 상태였다. 


 1974년 3월 13일, 윤한봉은 대전에서 황인성(서울대), 임규영(경북대)을 만나 경북대와 영남대의 시위 계획을 들었다. 윤한봉이 절치부심 노력했지만 전북대 주체가 발굴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3월 23일, 윤한봉은 선언문 작성에 들어갔다. 곧 선언문이 완성되었고 박형선, 문덕희, 최철 등과 모여 등사기로 유인물을 제작했다. 마침내 자유수호구국 비상광주학생총연맹 명의의 ‘자유수호구국선언문'이 준비되었다. 유인물 인쇄가 진행되고 있던 3월 26일, 김상윤은 부산 구포역 인근에서 열린 비밀회동에 참석했다. 민청학련은 1974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동시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일부 구성원의 활동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되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이라는 단체가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고 국가체제 전복을 시도한 정황을 포착했다", "관련자들을 사형,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중앙정보부는 반유신 시위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존재한다고 발표하고 전방위적인 수사에 나섰다. 관련자들이 빠르게 검거되었다. 미검거자들을 대상으로 4월 8일까지 1주일 간의 자수기간이 공고되었다. 261명이 그 기간 동안 자수했다. 전남대 의대생, 전북대생 중에도 자수자가 있었고 호남권 조직도 완전히 노출되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자 윤한봉, 김상윤 등 광주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윤한봉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유서를 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유서를 쓰지 못했다. 윤한봉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수기간에 체포되지 않으면 그다음 날 보란 듯이 반유신 시위를 감행하자고 결의했다. 4월 6일, 윤한봉은 잠시 강진에 내려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그는 아버지께 "감옥에 갈 각오로 독재정권에 맞서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아버지는 눈을 한참 동안이나 감고 있었다. 잠시 후 "해라, 부디 앞장서지는 마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1974년 4월 9일, 전남대학교에 반유신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윤한봉, 김상윤, 최철, 박형선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계림동에서 전남대로 향하는 스쿨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버스 안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버스가 후문에 정차하자 박형선은 농대로 달려가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들은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학교에 등교한 활동가들은 1교시 타종과 동시에 전남대학교 본관 앞으로 집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교시가 진행 중이던 오전 9시경, 경찰이 느닷없이 교실에 들이닥쳤다. 수업을 듣고 있던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유선규는 "유선규가 누구야!"라고 묻는 경찰에게 떳떳하게 "내가 유선규다"라고 외쳤다.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차례로 구속되었다.


5. 1970년대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 下


 소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1,024명이 조사를 받았다. 이중 180명이 구속되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73명도 구속되었다. 가히 1970년대 최대의 시국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구속자 253명 중 전남대학교 활동가는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 김윤환, 문덕희, 박형선, 성찬성, 유선규, 윤강옥, 이학영, 이훈우, 이현택, 정환춘, 최 철, 하태수, 전영천, 박진. 총 18명이었다. 나상기(KSCF), 정찬용(서울대)도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국가폭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18 민주광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전일빌딩 앞에 위치한 '민주의 종'을 본 적 이 있을 것이다. 1974년, 그 자리에는 전남도경 대공분실이 위치했다. 윤한봉과 박형선은 그곳에 끌려가서 1주일 동안 맞았다. 어금니가 산산조각 났다. 두 사람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성지 사건'으로도 구속된 바 있던 김정길은 '김일성 만세'를 적으라고 강요받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다른 관련자들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민청학련 2심 판결문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민청학련 관련 광주 전남 구속자 18명 중 김윤환, 이현택 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조직도에 언급되는 윤한봉, 김정길, 이강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상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박형선, 유선규, 윤강옥, 이훈우, 정환춘, 최철, 하태수는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문덕희, 이학영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전영천, 박진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성찬성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광주에서 활동하는 나상기, 정찬용은 각각 징역 20년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실로 파렴치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이 준비했다고 발표한 무기라고는 '유인물'과 '화염병' 몇 개가 전부였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조직도 윤한봉, 김정길, 이강의 이름이 선명하다.


 재판부는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1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들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피고인이 학생이라는 관점에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조국의 보존과 번영에 배반되는 것이므로 눈물을 머금고 극형에 처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민청학련 사건 최후 변론에 나선 강신옥 변호사는 "유신헌법은 비민주적인 악법이다. 피고인 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싶을 정도의 심정이다"라고 발언했다. 이 말을 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재판장에서 강신옥 변호사를 체포했다. 그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세계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폭거였다.


 광주 출신 구속자들은 구치소에서 '까마귀'로 통용되었다. 이들은 서울 출신 수감자들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한복을 들여오지 못하고 새까만 관복을 그대로 입었다. 아버지가 의사인 윤강옥을 제외한 대부분은 농민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윤한봉은 영치품으로 한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 옷을 입고 나가면 함께 구속된 동지들이 더 외로울까 생각해, 입지 않았다. 알고 보니 광주 활동가들이 '까마귀'라 불린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자 중 한 명이자 이제는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중석(서울대)의 형이 광주 전남 관련자 전원에게 넣어준 영치품이었다. 그날 재판을 받고 있던 관련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한복을 입지 않고 나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1975년 2월 15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석방했다. 일부 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정권 인수' 시도라는 궤변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광주 전남 활동가들도 이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들의 재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상고를 기각했다. 관련자 8명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불과 18시간 뒤인 4월 9일, 즉각 집행되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었다. 대한민국은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보냈다. "유신체제에 대항하려 한다면 너희들도 이렇게 죽일 수 있다" 


경북대학교에 위치한 여정남, 이재문 추모비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1년 전인 1974년 4월 9일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10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자유를 만끽할 틈도 없이 인혁당 관련자들의 소식을 접했다.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윤한봉이 '학생운동의 전설적인 지도라'라 평가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여정남 경북대 총학생회장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대다수는 대구 경북 출신이었다. 민청학련 조직도에 '서울 지도부'와 함께 '경북 지도부'가 주축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특히 사형에 처해진 8명 중 절반은 대구 경북의 교사, 기자, 활동가였다. 인혁당 사건으로 대구 경북의 민주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점을 5·18이 광주에서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75년, 문교부가 총학생회 폐지와 학도호국단 부활을 선언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이 만들었던 학내 군사조직이다. 학생들이 강제로 학도호국단에 소속되었으며 대학교 총장이 대장을 맡았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자치를 말살하여 학생운동을 완전히 제압하려 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깊은 동면에 들어갔다. 그해 5월,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다시 한번 짓밟았다. 해당 조치는 박정희 사망 직후까지 유지되었으며 양심적 시민 1천 여명이 해당 조치 위반으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들의 소식을 접한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6. 민청학련 세력, 광주에 자리 잡다


 1975년 2월 15일, 광주 전남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남대학교 재학생이었다. 윤한봉은 석방된 직후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 구상을 시작했다. 김정길, 이강, 김상윤, 박형선, 김운기(조선대 경영 70)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든든한 버팀목으로 함성지 사건 변호인이자 지역사회 큰 어른인 홍남순 변호사를 모셨다. 전남대 법대 1회 졸업생이자 첫 사법고시 합격자인 이기홍 변호사도 합류했다. 전남대학교 안진오, 송기숙 교수, YMCA 이성학 장로, YWCA 조아라 장로, 천주교 김성용, 조비오 신부, 황석영 작가, 문병란 시인도 함께 해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5·18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게 된다. 그즈음 민청학련 사건에는 연루되지 않았던 김남주가 '카프카'라는 이름의 책방을 열었다. 카프카는 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김남주는 원체 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훗날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되는 황광우는 1975년에 카프카에서 김남주와 만났던 기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선배는 한 움큼의 유인물을 나에게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여 학우들의 책상 속에 넣었다. 나도 형을 따라 전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황광우 역시 광주일고 재학생으로 운동세력에 합류했다. 김남주는 카프카 폐업 이후 서울로 올라가 남민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합류한다. 한편, 19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로 강제 징집되었던 정상용과 이양현 등이 학교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군대 덕에 민청학련 사건을 피했다. 물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대를 피한 사람도 있었다. 이때부터 광주 사회운동은 분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 중심이 바로 1970년대 광주 사회운동의 거목이었던 윤한봉과 김상윤이었다. 황광우는 본인의 저서 '레즈(Reds)를 위하여'에서 그 두 사람을 이렇게 평가한다.


 "윤한봉 선배는 광주 전남에서 일어나는 여러 투쟁을 도우면서 후배들에게 실천적 기둥이 되어주었다면, 김상윤 선배는 그 특유의 예리한 논리적 사유의 힘을 가지고 후배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사상적 사조들을 소개해 준 이론적 기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윤한봉은 지역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김상윤, 김정길은 전남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운기의 주도하에 조선대학교에도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5년 뒤, 김운기는 조선대학교 대표자로 5·18에 연루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족사회연구소 후신인 교양독서회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974년 10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훈방된 오재일(법학 71) 주도하에 새로운 사회운동 동아리 '루사(RUSA)'가 만들어졌다. 루사는 전남대학교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첫 사회운동 동아리가 되었다. 루사는 1975년에 본격적인 조직의 틀을 갖추었고 이재의(경제 75), 송선태(국문 75), 문백란(교육 74) 등이 합류했다. 이재의는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전남대 학보사 편집장 이평의의 동생으로 5·18을 겪은 후 전용호와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가 된다. 1976년에는 박형선의 동생이자 들불야학 창립자 박기순(역사교육 76)이 루사에 합류했다.


 1975년에는 정상용과 이양현 주도로 메시아(맷돌)가 만들어졌다. 이세천(국문 74), 김금해(역사교육 74) 등이 합류했지만, 메시아는 얼마 못가 해소되었다. 정상용은 정용화와 함께 전남청년운동연합을 만들었다. 이강과 박형선은 농촌으로 돌아가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합류했다. 이양현은 청계천으로 올라가 현장을 경험한 후 노동운동 주체가 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나상기는 석방 이후 광주에 정착했다. 그는 KSCF(기독교 학생회)를 만들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각각 조직이 생겨났다. 맷돌 출신의 이세천, 김금해가 합류했고 박현옥(영문 75), 송경란(간호 76), 김영종(농학 75) 등도 합류했다.


 1976년 4월 19일, 4.19를 맞아 전남대학교 기독교 학생회는 유인물 배포를 준비했다. 역사적 기념일을 맞아 학생운동 세력이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하에 경찰들이 각지에 포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류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김영종이 유인물 배포를 시도했다. 그는 유인물을 뿌리려는 순간 체포되었다. '문학부 등나무 시위 사건'으로 회원 8명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자퇴를 강요받았다. 결국 기독학생회는 위기를 맞았고 2년 후에야 다시 활동을 제기할 수 있었다. 광주일고의 또 다른 이념서클 '피닉스' 출신들은 1976년 3월, 전남대학교 사회과학 서클 '독서 잔디'를 만들었다. 독서 잔디는 훗날 전남대학교 총장이 되는 지병문이 주도했으며 이학영(민청학련), 신영일(들불야학), 박용수(화학교육 75)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얼마 뒤 이학영도 서울로 올라가 위장 취업했으며 남민전에 합류한다.


 당대의 광주 학생운동은 표면적인 이념서클 루사, 독서 잔디, 맷돌 등이 주도했으며, 그 배후에 학습을 주도하던 김상윤, 김정길이 있었다. 김상윤은 소그룹 단위의 학습을 통해 활동가들을 양성했고 활동가들은 이후 서클 등에 합류했다. 서클이 하는 활동은 지금의 사회운동 동아리들이 하는 활동과 대부분 일치한다. 이들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서적을 함께 공부했고 역사적 기념일에는 행사를 열어 해당 사건의 의미를 공부했다. 박석무(교사), 김상윤 등 이론가들이 학습을 도왔다. 야유회도 진행했고 운동의 방법론도 토론했다. 소그룹 중심의 학습을 천명한 김상윤은 1977년 1학기까지 많은 활동가들을 양성했다. 윤상원(정치외교학 71), 노준현(화학공학 75), 김금해, 김영종 등등의 활동가들이 학내에 진출했다. 윤상원은  복무 중 아버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생각입니다." 그는 졸업 후 잠시 서울 주택은행에서 근무했지만 결국  편지 내용처럼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이렇듯, 민청학련의 거센 파고 이후 광주의 사회운동 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한 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생운동 (김상윤, 김정길, 김운기), 청년운동 (정상용, 정용화), 농민운동 (이강, 박형선), 노동운동 (이양현, 이학영), 기독교 운동 (나상기, 최철) 등 각자의 특성을 살린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광주의 운동 진영은 진용을 갖춘 채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7.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과 광주 부활절 사건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를 조직한 윤한봉은 광주 전역의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자금 문제였다. 윤한봉은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5월에 열리던 전남대학교 대동제에서 회원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팔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한 학생처장이 한 통을 전부 구매했다.


 지금은 상상도 안되지만, 윤한봉은 당시 분수대는 없었고 토끼가 가끔 뛰어다녔다는 '봉지 광장'에서 활동가들과 이런저런 학습을 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월부책 장사까지 했다. 민청학련 당시 몽둥이를 휘둘렀던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을 찾아가 "당신들 땜시 복학도 안되고 과외도 못해서 힘들다"며 책을 팔았다. 이어 전남대 총장에게도 찾아가서 책을 팔았다. 총장도 사주었다며 교수들을 만나서 책을 팔았지만 많이 팔지는 못했다. 윤한봉이 2달간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책을 판매한 결과 240만 원이라는 큰돈이 모였다. 그는 훗날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했으며 이를 위해 억대의 돈을 모았는데, 실로 탁월한 수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전남대학교는 광주 서구에 위치했다.


 1976년 3월 1일, 긴급 조치 9호로 인해 꽁꽁 얼어있던 한국 사회가 요동쳤다.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함석헌, 김승훈 등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긴급조치 해제, 민주인사 석방, 박정희 퇴진을 요구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윤한봉은 우선 선언문 전문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연락을 돌렸다. 기독학생회 나상기를 통해 캐나다 토론토에서 전충민이 발행하는 '뉴타임스 코리아'에 실린 전문을 입수할 수 있었다. 나상기는 마침 기독학생회에서 이걸로 학습을 하려고 하니까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소는 신광교회였다.


 4월 3일, 윤한봉은 신광교회에 가서 기독학생회 구성원들에게 '민주구국선언문'을 읽어주었다.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들이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멀쩡해가지고 있으니까 영 그렇다"는 등, 구성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영종, 송경란, 이세천 등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있었다.


 1976년 4월 19일, 윤한봉이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4.19도 되었으니, 교정을 거닐고 싶었다. 당시 인문대학 (문리대)에 묘가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있자 윤한봉을 알아본 재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날 학교에는 역사적 기념일을 맞이하여 학생운동 세력이 움직일 것을 우려한 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다가와 "오늘이 4월 19일이기도 하니까 걱정이 된다. 학교에서 좀 나가 달라"라고 요구했다. 윤한봉은 "잘못한 게 있으면 잡아가라"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기독학생회 김영종이 그날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체포되었고 윤한봉은 문제를 키우지 않기 위해 우선 자리를 피했다.


 김영종은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심각한 고문을 당했고,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윤한봉을 감추는데 실패했다. 그는 "윤한봉 선배가 민주구국선언을 알려주었고 원로들이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윤한봉은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민주구국선언문도 압수되었고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1977년 12월 9일 자로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0개월간 감옥에 있었다. 훗날 이 사건은 '부활절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 부활절과 련이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8. 겨울공화국 필화사건, 표현의 자유를 짓밟다.


 1975년 2월 12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 촉구'가 핵심 취지였다. 이로부터 3일 뒤, 박정희는 민청학련 관련자 대다수를 석방하는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그런데 기도회 때 낭송된 한 편의 '시'가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다. 당시 광주 중앙여고 교사였던 시인 양성우는 이 자리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 '겨울공화국'을 발표했다.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겨울 공화국 -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걸 웃어대거나 웃다가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은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길지만, 전문을 수록했다. 이 시는 유신체제의 압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태를 파악한 중앙여고 측은 양성우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양성우는 이를 거부했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분노한 중앙여고 학생 10여 명은 돈을 모아 1975년 2월 20일 자 동아일보 광고판에 "가라 껍데기는 가라! 광주 중앙여고 학생들"이라는 광고를 냈다. 1974년 10월 24일, 언론인 송건호가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자 분노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 광고면은 백지로 발간되었고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워주었다. 일명 동아투위 사건이다. 중앙여고 학생들은 양성우와 동아일보를 통해 억압에 저항했다.


 이틀 뒤에는 "혹시 선생님은 교사 노예가 아니신지요(?) 광주 J여고 대다수 학생"이라는 내용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시민단체들도 양성우 지키기에 나섰다. 그러나 4월 12일 자로 파면 징계가 확정되었다. 중앙여고 학생 700여 명은 수업 거부로 양성우 교사에 대한 파면 징계에 항의했다.


 1975년 4월 12일, 파면당한 양성우는 굴하지 않고 광주 YMCA 무진관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겨울공화국'이 다시 한번 낭송되었다. 양성우는 학교를 떠난 후에도 시 '노예수첩'을 썼다. 그의 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좌파 계열 잡지 '세카이 1976년 6월호'에 실렸다. 정보를 찾는 게 힘겨웠던 시절, 세카이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당사자 인터뷰를 보도하는 등 한국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당국은 양성우의 시가 해외 잡지에 실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1977년 6월,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양성우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시 '노예수첩' 발표와 함께 시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를 지인들에게 배포한 일도 문제가 되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표현의 자유'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1980년 5월 19일, 전날 광주 대학생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중앙여고 학생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 시위를 주동했다.


9. 1977년 여름 김상윤, 녹두서점을 열다


 1977년 7월, 광주 계림동에 ‘녹두서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은 김상윤이었다. 이 서점은 훗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한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기도 했던 김상윤은 석방된 후부터 활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윤상원, 노준현, 김영종, 김금해를 비롯한 걸출한 활동가들이 그가 만든 학습 소모임을 거쳐갔다. 전남대 졸업 후 서울 CBS에서 근무하고 있던 송정민이 매달 3만 원을 보내 모임을 도왔다. 1년 6개월 간의 모임 운영을 마친 김상윤에게는 새로운 기획이 있었다. 운동진영에 이론을 보급할 거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가 장두석이 계림 신용협동조합을 통해 100만 원을 융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병란 시인이 ‘녹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봉준 장군의 초상화가 서점에 걸렸다.


 녹두서점은 곧 광주 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거점이 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적을 상실한 사람들도 자주 왔고 전남대, 조선대 활동가들도 새로운 책이 들어온 건 없을까, 녹두서점을 기웃거렸다. 김상윤이 서울에서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오는 날에는 녹두서점에서 자연스레 정모가 열렸다. 녹두서점에는 2개의 방이 있었다. 서점과 이어진 앞쪽 방이 있었고 그 뒤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1971년, 민족사회연구소 주도의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로 강제 징집되었던 이양현이 뒷방을 차지했다. 그는 제대한 후 청계천으로 올라가 청계노조 노동교실에 관여했으며 이후에도 노동운동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녹두서점에서 애인 선점숙과 동거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훗날 함께 전남도청을 지키는 이양현과 윤상원은 서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김상윤을 장난스레 채근하고는 했다.     


 1977년 10월, 김상윤에게도 운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중학교 교사 정현애였다. 그가 서점을 두리번거리자, 김상윤이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물었다. 정현애는 “리영희 교수의 8억 인과의 대화를 찾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금서를 찾고 있다는 말에 서점에 있던 김상윤과 윤상원은 당황했다. 이내 “정선자의 소개를 받고 왔다”는 말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현애와 정선자는 전남여고 동창이었다.     


 1974년 2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함께 석방된 김지하 시인이 옥중수기 ‘고행 1974’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그는 석방된 지 27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다. 이때 김지하가 옥중에서 겨우 사회로 내보낸 문장들이 ‘양심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정선자는 이화여대에서 해당 문건을 배포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살아야 했다. 학교에서 제적된 정선자는 알고 지내던 사법고시 준비생 김이수와 결혼한다. 김이수 역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초를 겪었다. 정선자는 복학 후 이화여대 최초의 기혼자 졸업생이 되었다. 1980년 5월 이후 정선자의 집은 한동안 5·18 관련자들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이수는 군법무관으로 5·18 재판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시신 검시 업무에 동원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도 진행했다. 아내가 5·18 관련자를 숨겨주고 있는데 남편은 그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다니 실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김이수는 1심 판결에서 5·18 관련자 배용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 광주고속버스기사 배용주는 ‘차량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배용주가 운전하던 버스 내부로 들어왔다. 배용주는 차량을 버리고 자리를 피했다. 배용주의 버스는 경찰 저지선에 충돌했고, 이 사고로 경찰관 4명이 사망했다. 불의의 사고였다. 배용주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7년,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받은 김이수는 국회 청문회장에서 배용주와 재회했다. 김이수는 자신의 판결을 사과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1977년 12월, 정현애가 또 녹두서점에 왔다. 그날 김상윤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정현애에게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현애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달라”라고 고백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무모한 청혼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현애가 더 무모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1978년 11월에 결혼했다. 김상윤의 회고다. 이후 두 사람은 40년을 넘긴 현재까지 백년해로를 이어가고 있다.     


 1980년 5월, 녹두서점은 시민군 상황실이 되었다. 그곳은 사랑방이었고 회의실이었다. 광주 전역에 뿌려지는 유인물과 현수막 대부분은 녹두서점에서 만들어졌다. 홍성담은 10일 동안 녹두서점에서 글씨를 썼다. 김상윤, 정현애 등 녹두서점 가족 여섯 사람이 5·18에 연루되었다. 김상윤은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고, 남동생 김상집은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여동생 김현주는 장두석이 만드는 양서협동조합 간사로 일하던 중 항쟁에 가담했다. 김현주의 남편 엄태주도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정현애는 5·18 당시 10일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구속자 가족들을 규합하여 5·18 이후의 오월 운동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전력에 다니던 여동생 정현순도 5·18에 가담하여 10일간 녹두서점을 지켰다.     


10. 윤한봉, 박정희 암살을 고민하다


 1977년 겨울, 윤한봉은 대구교도소에 있었다. 그곳에는 28년째 수감 중이던 비전향 장기수도 있었다. 그는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윤한봉에게 감옥은 좋은 학교였다. 그는 여러 책들을 섭렵하며 이론무장을 강화했다. 함께 징역을 살던 최열은 환경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출소 이후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환경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윤한봉도 역사를 시작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출소를 앞둔 어느 날, 박형선이 찾아왔다. 농대 동기였던 박형선은 어느새 윤한봉의 여동생 윤경자의 애인이 되어있었다. 박형선은 영치품으로 책 한 권을 넣어주었다. 윤한봉은 박형선이 창문 너머로 손 흔드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박형선이 넣어 준 책은 며칠 뒤에야 윤한봉에게 전달되었다. 의아했다. 책은 알렉세이 ‘뿌리’였는데, 쎄한 느낌이 들어 책을 자세히 살펴보자 문장 사이에 글자가 숨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조합한 결과 조.직.의.명.령.이.오.어.서.나.오.시.오.하.마.참.새.재.비 라는 문장이 나왔다. 윤한봉은 볼펜으로 글자들을 지웠다. 그러나 책을 넣어주기 전에 확인을 안 해볼 교도소 측이 아니었다. 미리 이런 문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당국이 윤한봉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책을 넣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직사건’을 예감했다. 윤한봉은 대구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양팔이 묶였고 백열등이 눈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조직의 실체’를 물었다.

 억울한 일이었다. 박형선은 윤한봉이 괜한 고집을 부려 감옥에 남게 될 것을 염려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윤한봉이 받았던 징역 15년이 ‘집행정지’되었을 뿐 법적 효력은 남아있었다. 이미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징역을 다시 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박형선, 정상용을 비롯한 윤한봉의 동지들은 그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고집스러움을 알았기 때문에 독재와 싸우더라도 나와서 싸우자는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마, 참새, 제비는 정상용, 박형선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광주 요시찰 대상들의 소재를 파악하던 중앙정보부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형선, 김정길, 정상용, 김남주 등 평소 감시하고 있던 대상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또 큰 일을 벌이겠다고 생각한 중앙정보부는 조직역량을 총동원하여 소재 파악에 나섰다.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윤한봉은 독방에서 자결을 시도했다. 도구를 찾을 수 없어 최선을 다해 벽에 머리를 박았다. 한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실 윤한봉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박정희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법살인으로 8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군부독재를 가만둘 수 없었다. 유인물과 단편적인 시위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상용, 이양현 등 민청학련에 연루되지 않고 강제 징집되었던 활동가들과 훗날 남민전에 연루되는 조개석, 김남주 등 소수의 멤버를 모아 비밀스럽게 거사를 준비했다. 그즈음 민족사회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정용화가 입대한 후 하필 청와대 경호실로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용화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시위 준비를 도왔다. 그러나 구속된 사람들이 정용화의 이름을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에 그는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훗날 윤강옥은 "진술과정에서 너는 완전히 뺐었다"고 전해주었다. 


 1976년 여름, 이양현과 정상용이 청와대로 면회를 왔다. 정용화는 "독재자 박정희를 암살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급히 휴가를 내고 광주에 내려왔고 이양현, 정상용, 김남주, 김정길 등과 회동했다. 장소는 김정길이 마련한 사랑방 '봉선동 산채'였다. 녹두서점, 윤강옥의 집, 봉선동 산채 등이 당대 활동가들의 거점이었다. 이미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수류탄 3정이 구해져 있었다. 6.25 전쟁 종결로부터 2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일부는 군부대에서 몰래 반출했다. 활동가들은 '봉선동 산채'에서 '거사'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적으로 계획은 보류되었다. 독재자는 죽어 마땅하지만, 민중 스스로의 힘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끝장을 봐도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1977년 겨울, 중앙정보부는 3일 만에 광주 활동가들의 소재를 파악했다. 사실 그들은 단체로 수련회에 갔었다. 윤한봉은 하마와 참새의 의미를 설명했다. 결국 이번 일은 공안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발각될 것을 우려한 활동가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낚시하는 데 사용했고 나머지 물건들도 처분했다. 그러나 박정희 18년 독재는 끝내 종국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신의 미궁을 뒤로한 채 1978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11. 농민운동의 효시, 함평 고구마 사건


 1976년, 전남 함평군은 예년보다 훨씬 많은 2만 5천 여 톤의 고구마를 생산했다. 농협이 농민들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해 농협은 함평 농민들에게 고구마 1포대를 1,317원에 구매하겠다고 알리며 고구마 생산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심지어는 광고까지 진행했다. 농민들은 이 말을 믿고 고구마를 대량 생산했다. 그러나 출하 시기가 다가왔지만, 농협은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협에서 나누어 준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길가에 쌓아두었지만, 고구마를 수매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농협은 곧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윽고 고구마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농민들은 고구마를 헐값에 팔아치워야 했다. 피해가 막심했다.


 1976년 11월 17일, 사태를 파악한 농민운동 단체 가톨릭농민회가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보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서경원이 위원장을 맡았다. 가톨릭농민회에는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 이후 농민운동에 뛰어든 이강이 교육부장으로 있었다. 곧 대책위의 피해조사가 시작되었다. 대책위는 총피해액을 최소 1억 4천만 원으로 예상했다. 7,300 가구의 농가가 평균 2만 원대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피해조사를 시작했지만, 조사에 응하는 농가는 극히 적었다. 서슬 퍼런 유신시대였다. 불과 20여 년 전 '나라님에 맞선던 이들'의 최후를 농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이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받아냈다. 결국 대책위의 조사에 응한 건 160여 가구였고, 피해액은 309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1977년 1월 9일, 천주고 광주대교구가 조사 결과를 두고 농협 측에 보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농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곧 탄압이 시작되었다. 4월 22일에는 광주 북동성당에서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농민들은 시위에 나섰지만, 농협 전남지부 진입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후 투쟁의 동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많은 농민들이 대책위를 떠났다. 대책위는 고심 끝에 1978년 4월 24일을 기점으로 마지막 총력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광주 북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우선 700여 명의 농민들이 북동성당에 모여 농민대회를 열었다. 유신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수백 명의 농민들이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개최한 것만으로 위대한 전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밤, 농번기라는 계절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고 73명이 남아 단식에 돌입했다. 1977년 12월 9일 자로 출소한 윤한봉과 황광우, 조계선, 박형선 등 광주 활동가들도 이들에 대한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윤한봉은 단식을 지원하기 위한 물건부터 모았다. 북동성당 측의 불허와 경찰의 탄압 때문에 치밀한 준비 없이 과감하게 단행한 단식투쟁이었다. 그는 문병란 시인의 집에서 솜이불, 수건 등을 비롯한 생필품을 죄다 끌어모았고 곳곳에서 물건들을 공수했다. 경찰이 북동성당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담벼락을 넘어 물건들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평소 어마어마한 양의 식사를 하는 농민들에게 갑작스러운 단식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연명도 중대한 과제라는 조계선의 주장에 따라 미숫가루도 몰래 반입했다. 이후에는 농민들의 단식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가 기획되었다.


 한편, 함께 단식을 하던 활동가들도 있었다. 이강은 사건이 끝나는 시점까지 단식에 함께했다. 단식이 3일째 되는 날, YWCA의 조아라 장로가 찾아왔다. 조아라는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 후 지원연설을 시작했다. 조아라 장로. 일제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도 신사 참배 거부로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던가. 조아라 장로가 배고픈 다리에서 아이를 엎고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농민들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엉엉'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강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 조아라 장로를 돌아가실 때까지 존경했다고 회고한다. 조아라 장로는 일흔 가까운 나이에 5·18에 연루되어 또 1년여간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석방 후 5·18 진상규명과 관련자 지원에 헌신했다. 연설을 들은 농민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결의를 다졌다.


 광주의 '운동선수'들도 외부적인 지원을 위해 총집결했다. 이들은 매일 북동성당 앞에서 연대집회를 열었다. 단식이 4일째 되는 날에는 YWCA에서 북동성당까지 행진을 했다. 이미 전국적인 사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경찰의 봉쇄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고 북동성당에 집결하여 '고구마 피해 보상하라!', '유신체제 물러가라!', '농민운동 탄압 즉각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성당 내부에 있던 단식자들은 큰 힘을 받았다. 이강은 윤한봉이 외부 총책을 맡아 집회를 진두지휘 했었다고 회고한다.


 단식 4일 차인 4월 27일,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한 당국이 해결에 나섰다. 만나서 협상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가 중재를 맡았다. 당국 측에서는 고건 전남도지사, 중앙정보부 전남 국장 김광호, 농협 전남지부장, 전남도경국장 등 5명이 나왔다. 가톨릭농민회 측에서는 전국본부 이길재, 전남본부 서경원, 2대 대책위원장 임정택, 노금노, 이강 등이 나왔다. 김광호 국장이 농협 전남지부장에게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보소"라며 농협 측 입장을 요구했다. 농협 측이 입장을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고건 도지사가 "그러면 309만 원 중 100만 원을 받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건 어떠냐"며 합의를 종용했다. 분노한 서경원이 입을 열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 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고건 도지사님은 최연소 행정고시에 최연소 도지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배우셨다는 분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셔야 쓰겠습니까. 법적으로 봤을 때 이 같은 피해를 협상으로 흥정해서 해결하는 게 맞습니까?" 이강의 회고에 의하면 서경원은 고건의 이력을 날짜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며 언급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고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경원이 피해보상금을 전달하고 있다.


 결국 당국은 309만 원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두 손 두 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식은 구속자 석방과 보상금 즉시 지급을 요구하며 9일 차인 5월 2일까지 이어졌다. 농협 측은 농민들의 피해를 전액 현금으로 보상했다. 사건 직후 감사원은 농협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돌입했다. 조사 결과 농협이 고구마 수매자금 80억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농민들에게 고구마를 값싸게 구매한 후 문서에는 더 높은 금액을 기재하는 방식이었다. 농협 임직원 659명이 해직되었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농민운동사에 위대한 승리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해방 이후 터져 나왔던 농민들의 투쟁이 총칼로 짓밟혔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실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한편, 윤한봉은 마지막까지 철저했다. 그는 사건 직후 동지들과 함께 북동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70명이 사용한 침구류를 일일이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성당 기물들도 철저히 정돈했다. 윤한봉은 농민들의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12.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발표한 한 장의 선언서가 광주를 뒤흔들었다. 선언의 이름은 '우리의 교육지표', 박정희 군사교육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1968년에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황광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해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박정희의 졸개들이 작성한 국민교육헌장을 찢어버렸다. '우리의 교육지표'에 서명한 것은 명노근,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홍길, 홍승기, 이석연, 김두진, 김현곤, 김정수, 배영남. 총 11명이다. 원래는 전남대 김동원 교수도 함께 결의했지만, 그의 가족 중 좌익 경력자가 있어, 누명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판단하에 서명에는 빠지게 되었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원래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의 교수들과 함께 발표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 교수들의 서명이 모이지 않았다. 이에 전남대 교수 11명이 먼저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전남대 송기숙 교수는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통해 AP통신, 아시히 신문 등 외신에 선언서를 전달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서명에 참여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을 체포했다. 역시 엄혹한 유신시대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가장 먼저 나선 건 기독교 학생회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교수 배영남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후 1시부터 전남대학교 봉지 광장에서 '연행된 교수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주동자는 이영송(국문 76), 노준현(화학공학 75), 박현옥, 안길정 등 회원 20여 명이었다. 이날 기도회는 큰 충돌 없이 끝났다.

 그날 밤, YWCA에서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리의 교육지표'가 배포되었다. 한편, 전남대학교 활동가들은 이황(이강의 동생)의 자취방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노준현, 정용화, 박석삼, 박몽구, 김윤기, 조봉훈, 김선출, 안길정, 박현옥 등이 모였다. 이들은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노준현이 주동자를 맡았고 박몽구가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김상윤, 윤한봉과 함께 학습을 했던 전남대 활동가들이었다. 작성한 선언문은 YWCA 측을 통해 인쇄를 맡겼다. 다음날인 6월 29일, 김선출이 택시를 타고 유인물을 찾아왔다. 이윽고 활동가들이 각 단과대학에 유인물을 배포하고 '중앙도서관으로 모이자!'고 외쳤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준현이 연설과 함께 집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준현은 곧 교직원들에게 끌려갔으며 경찰에 인계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2, 3층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 수백 명이 최루탄을 쏘고 여러 차례 진입을 시도했고 밤늦게까지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다음날, 전남대학교 측은 7월 5일까지의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윤한봉에게 직접 지도받고 있던 박석삼이 문승훈, 박기순과 함께 시위를 주동했다. 소식을 듣고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계림동 녹두서점까지 행진했다. 이 시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헤쳐 모여' 전술이 등장한다. 이들은 만약 시위가 경찰의 봉쇄에 의해 막힐 경우의 집결장소를 사전에 공지했다. 충장로 진출에 실패하면, 1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4시에 조선대 정문에 집결하자는 게 이들의 전술이었다. 시위는 성공적으로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되었다. 경찰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유신시대에 가두행진이 광주 전역을 뒤흔든 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윤한봉은 박석삼을 불러 자신이 작성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상황일지'를 서울에 전달하는 중책을 맡겼다. 박석삼은 서울에 가서 백낙청, 성내운 교수를 만나 해당 문건을 전달했다. 이후 그는 수배 대상이 되었고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7월 3일,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우리의 교육지표와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 지지를 표명하며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에 합류하여 활동하던 김운기(금속공학 75)를 중심으로 한 학내 조직이 주도했다. 조선대학교 학생 양희승, 박형중, 김용철, 유재도. 4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그대로 5·18 당시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구성원들이 된다.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 이후 1주일간 이어진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끈질긴 시위로 500여 명이 연행되었다. 1970년대 최대 규모의 가두시위였다. 전남대 재학생 김윤기, 김선출, 노준현, 안길정, 문승훈, 박병기, 박몽구, 박현옥, 신일섭, 이택, 이영송, 정용화, 최동열, 한동철 등 14명이 구속되었다. 박기순, 신영일, 양강섭 등 10명은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YWCA에서 유인물 제작을 도왔던 김경천 간사와 인쇄업자 정호철도 구속되었다.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전원 해직되었으며 송기숙 교수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엄혹했던 유신의 끝자락에 자리한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 사건을 결코 교수들만의 저항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1주일간 500명이 연행될 정도로 끈질기게 지속된 학생들의 저항은 5·18 민중항쟁의 위대한 전초전이었다.


13. 1978년 여름, 들불야학의 탄생


 1978년 여름, 광주 광천동성당에서 어느 작은 학교의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교의 이름은 들불야학 (夜學),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을 알고, 바꾸어 나가기 위한 변화의 교두보였다. 들불야학을 처음 제안하고 조직한 건 전남대학교 활동가 박기순(역사교육 76)이었다. 그는 대학 입학 직후 사회과학 서클 '루사'에 합류한 후 자연스럽게 활동가가 되었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등 당대 전남대 학생운동 세력의 크고 작은 활동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또한 동료 활동가들에게 전설적인 선배였던 박형선(민청학련)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이강이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구 동생 이런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는 항상 군복 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입었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외형적인 치장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에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실로 주체성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1977년, 박기순은 광주 산수동에서 진행된 꼬두메 야학에 참여했다. 해당 야학은 운동성을 갖춘 곳은 아니었고, 검정고시 공부를 중점으로 운영되었다. 꼬두메 야학은 불과 10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박기순은 그곳에서 야학 운영 방법을 터득했다. 그해 겨울 박기순은 서울로 올라가 노동운동 동향 및 흐름을 파악한다. 특히 서울의 노동야학 '겨레터 야학'을 둘러보고 깊은 울림을 받는다. 1978년, 겨레터 야학 활동가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이 광주에 왔다. 셋은 모두 광주일고 출신이었다. 전복길과 김영철은 서울대 재학생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영영장을 받고 광주에 내려와 있었다. 겨레터 야학 활동가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박기순은 이들을 찾아가 함께 야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뜻을 모았고,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박기순의 권유를 받고 신영일과 임낙평이 합류했다. 최기혁, 김영철은 광주일고 동창 나상진(토목공학 77)을 끌어들였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박기순,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 신영일, 임낙평, 나상진. 여기에 입학식 이후 이경옥이 합류하여 1기 강학은 총 8명이다.


 이들은 함께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강독했다. 해당 저서는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주체로서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교육은 자유의 실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들불야학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진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들불야학에는 강학과 학강이 있었다. 배우면서 가르치며, 또한 가르치면서 배운다. 이러한 새로운 구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실천이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그는 유현종의 소설 '들불'에서 이름을 땄고 '들불'이라는 단어가 '미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도 등장한다며 강조했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박기순의 안은 가볍게 통과되었다. 다음으로 야학을 운영할 장소가 논의되었다. 노동야학에 걸맞게 광주 유일의 공단지역인 광천동에 터를 잡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공간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기순은 주변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톨릭 농민회 장두석이 조비오 신부를 통해 광천동성당 관계자와 연결시켜 주었다. 박기순이 직접 신부를 찾아가 부탁하자,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광천동성당 교리 학습실을 빌릴 수 있었다. 이어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 홍보 결과 35명이 들불야학 1기 학강이 되었다. 1978년 7월 23일, 들불야학이 닻을 올렸다. 광천동 마을 운동가 김영철(동명이인)과 광천동성당 신부가 축사를 했다.


 얼마 후, 박기순은 공장에 취업했다. 취업처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하청업체 동신강건사였다. 이미 꼬두메 야학을 하던 시절부터 대학은 박기순의 마음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다.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곧 1기 강학 전복길, 김영철이 군대에 입대했다. 새로운 강학이 필요했다. 함께할 사람을 수소문한 결과 전용호, 배환중 등이 대기 강학으로 합류했다. 한편, 박기순은 대학 졸업 후 서울 주택은행에 취업한 윤상원(정치외교 71)이 광주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은 6개월 만에 직장을 떼려 치고 광주에 왔고 박기순에 이어 광천공단에 취업했다. 박기순은 윤상원에게 들불야학 참여를 권유했다. 윤상원은 처음에는 박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끈질긴 설득 공세에 탄복하여 대기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는 이날 대기 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1978년 겨울, 들불야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14. 박기순, 세상을 떠나다


 1978년 12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들불야학 팀이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로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박효선은 3기 특별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하여 '문화'를 다루게 된다. 윤상원이 들불야학에 합류하고 두 달 남짓, 들불야학은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뒤풀이를 했다. 윤상원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방을 얻어 백재인 학강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 화정동에 땔감을 하러 갔다. 광주소년원 뒤편 야산에 올라 장작을 모았다. 그날 밤, 박기순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당시 박기순은 오빠인 박형선과 윤경자 부부, 막내 박동준과 함께 주월동 국민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사돈에 해당하는 윤한봉이 자주 집에 찾아왔다. 그날도 윤한봉이 왔다. 박기순이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윤경자는 윤한봉에게 박기순의 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나 곧 박기순이 왔다. 윤한봉은 큰 방에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박기순이 일어나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했다.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박기순이 문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전남대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연탄가스 누출사고였다. 박기순, 그해 스물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우리의 교육지표'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광주 전남 최초로 위장취업자가 되었던 위대한 활동가였다. 그리고 너무나 애석한 죽음이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전남대병원으로 모여들었다. 황망한 소식에 다들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 보낸다고, 통곡하는 들불야학 학강들도 있었다. 위대한 노동운동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이강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박기순의 장례를 준비했다. 영결식 이후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12월 27일, 노동운동가 박기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 광주 전남 지역 활동가들과 들불야학 관계자들이 집결했다. 황석영 작가와 문병란 시인이 조사를 낭독했다. 지난 2월, 박형선과 윤경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한 해를 시작했던 황석영은 박기순의 죽음과 함께 1978년을 마무리하는 현실이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우리의 교육지표'의 홍승기 교수도 조사를 낭독했다.


 "서석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하였습니다. 성탄의 밤은 그렇게도 조용하였습니다. 그 계절의 벼랑에서 저는 너무나도 슬픈,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살아왔습니다. 깊은 골짜기의 쓸쓸함 홀로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당신 앞에서 누가 감히 의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영결식에 참여한 가수 김민기가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민기는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들렀다가 황망한 소식을 접하고 영결식에 참석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친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운구차는 망월동을 향해 느린 걸음을 시작했다. 들불야학이 있던 광천동성당에 들리자 박기순에게 교리 학습실을 내주었던 오수성 미카엘 신부가 영결미사를 진행했다. 이후 운구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을 들린 후 망월동으로 갔다. 박기순은 그곳에 영원히 잠들었다. 박기순의 운구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그 길, 도로는 태극기로 가득했다. 다음날인 1978년 12월 28일, 박정희는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재자는 자신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15. 광주 여성운동의 뿌리 송백회와 삼봉조합의 형성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구속된 전남대 교수들의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이들은 털양말과 책을 수감자들에게 넣어주었다. 곧 구속자 가족들 사이에 끈끈한 결속이 형성되었다. 광주 구속자 가족들은 단체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송백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했다. 나혜영이 회장을, 홍희담 작가가 총무를 맡았다. 그해 말, YWCA에서 출범식이 열렸다. 1979년, 윤한봉은 이들과 함께 옥바라지를 진행하기 위해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그곳은 자연스럽게 송백회 회원들의 거점이 되었다. 윤한봉은 동지들에게 "족보, 일기장, 집문서 빼고 책이란 책은 다 가져오라"는 무서운 지령을 내렸고 곧 3천여 권의 책을 사무실에 모았다. 그는 송백회 회원들과 함께 전국의 구속자들에게 책을 전달했다. 책을 다 읽을 때쯤 되면, 새로운 책으로 교환해주었다.


 송백회 구성원들은 초기에는 구속된 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을 시작했다. 1970년대, 당대의 사회운동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칠흑과 같은 '유신'과의 대결이 지상목표였다. 그러나 송백회 회원들은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여성학을 수용하고 일본 기생관광의 실태, 농촌여성의 현실 등에 대한 학습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누군가의 아내로만 기억되지 않았다. 황석영 작가의 부인 홍희담 작가는 5·18을 겪은 후 도청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썼다. 홍희담 작가의 '깃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명노근 교수의 부인 안성례 여사는 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10일간 5·18을 경험했다. 그는 이후 5·18 진상규명 운동을 주도했고 광주시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시의원이 되었다. YWCA 김경천 간사는 16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송백회 회원이었다.


 송백회는 5·18 당시 YWCA를 둘러싼 활동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1980년 3월, 송백회의 추천으로 이윤정이 YWCA 사회문제부 간사가 되었다. 5·18 당시 송백회는 YWCA를 거점으로 움직였고 최후까지 그곳을 지켰다. 5·18 직후 YWCA 조아라 회장과 이애신 총무가 구속되었으며 이윤정, 정유아 간사는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이윤정이 훗날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 '오월 광주항쟁의 송백회 운동에 관한 연구'를 보면, 송백회와 YWCA를 중점으로 당대 여성운동이 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7년, 국제 앰네스티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은 '함성지 사건' 이후 평범한 교사로 살아가고 있던 박석무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6.3 항쟁에 참여했던 전남대 학생운동 1세대였다. 그는 광주 앰네스티 조직에 돌입했다. 곧 함성지 사건 당시 자신을 변호해주었던 이기홍 변호사를 찾아가 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종교계를 비롯한 광주의 재야인사들을 빠르게 조직했다. 천주교 조비오, 김성용 신부, YMCA 이성학 장로, YWCA 조아라 장로, 이애신 총무, 기독교 강치원 목사, 문정식 목사와 알고 지내던 교사들도 합류했다. 박석무 본인은 총무를 맡았다. 광주 재야운동 진영의 대부 홍남순 변호사도 고문으로 모셨다. 1977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선언일에 맞추어 가톨릭센터 5층에서 출범식이 열렸다. 광주 앰네스티는 YWCA를 사무실로 사용했다.


 박석무는 1975년 3월부터 대동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근무하는 대동고 교사 윤광장, 박행삼과 어울렸다. 윤광장은 윤한봉의 둘째 형이었다. 박석무는 곧 광주 전역의 반유신 성향 교사들을 규합하여 비밀모임을 시작했다. 대동고에는 이들 세 사람이 있었고, 중앙여고에도 송문재, 임추섭 교사와 '겨울공화국' 사건으로 해직되었던 양성우까지 세 사람이 있었다. 김준태(전남고), 윤영규(광주여상) 등도 합류했고 함께하는 교사의 숫자는 곧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모임의 이름을 삼봉조합으로 정했다. 삼봉은 화투용어 '고도리'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모임을 열 때면, "삼봉이나 한게임 치러 가자고"하는 연락이 온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면 정세를 토론하고 함께 공부를 했다.


 3년 뒤, 5·18이 일어나자 삼봉 조합원 7명이 항쟁에 연루되었다. 훗날 삼봉 조합원 중 박석무, 윤광장, 김준태, 윤영규 네 사람은 5·18 기념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삼봉조합은 교육운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모임이 형성한 기반은 곧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로 이어졌다. 윤광장은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전교협) 초대 광주전남지부장을 맡았다. 윤영규는 전교협 의장 및 초대, 2대, 3대 전교조 위원장을 맡았다. 삼봉조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교육운동이 결국 교사들의 전국 조직으로 이어진 셈이다.


 1979년이 되자 광주 지역사회에 각 부문운동이 명확히 자리 잡고 그 역량을 스스로 성숙시키고 있었다.


16. 1979년, 광주 사회운동 역량의 성숙


 1978년 11월, 광주 YWCA에 소비자 협동조합, '양서협동조합'이 생겼다. 그러나 해당 단체는 반 유신 운동의 교두보로 기능했다. 양서조합을 처음 제안한 건 신협 활동가 장두석이었다. 그는 신협에서 활동하던 중 가톨릭농민회에 합류하여 농민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해왔다. 김상윤이 녹두서점을 만들 때, 신협을 통해 100만 원을 융자해주기도 했다. 1978년 3월, 장두석은 황일봉에게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서협동조합 광주지부를 만들고자 한다"며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황일봉은 전남대 졸업 후 시민사회운동에 관여해왔던 사람이다. 양서협동조합 결성에 해직된 전남대 교수들과 박석무 등 삼봉조합 교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양서협동조합은 YWCA를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자연스럽게 사랑방 역할을 했다. 김상윤의 여동생 김현주가 간사를 맡았다. 당시 대동고 학생부장을 맡고 있던 박석무의 노력으로 김향득, 박병인과 같은 청소년들도 양서협동조합에 왕래했다. YWCA 서재에 다양한 책들이 쌓여갔다.


 윤한봉은 현대문화연구소를 만들었던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어디 가면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곳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약속 없이도 수시로 모일 수 있고, 정보 교환할 수 있고 그런데 이게 이를 테면은 75년에는 카프카 서점이 이제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인제 모이고 그랬는데 이게 수가 좀 불어나니까 그런 자리가 마땅치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이름은 애매한 게 좋으니까 '현대문화연구소' 이렇게 해브렀지"


 1979년, 광주의 사회운동 세력은 그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1년 후, 5·18의 위대함이 광주시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5월 27일, 항쟁의 완성은 이들이 역사에 뿌려둔 거름으로부터 연원 했다.


<1979년 광주 사회운동 진영>


광주 앰네스티 (홍남순, 이기홍, 박석무) - 구성원들이 1세대 인권변호사들로 지역사회 큰 어른 역할 수행


천주교계 (조비오, 김성용, 윤공희 대주교) -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중간지원 역할 수행


YMCA (이성학, 명노근, 윤영규) - 반 유신 교육운동 주도, 지역사회 반유신 운동 지원


YWCA (조아라, 이애신, 이윤정) - 양서협동조합 등의 거점으로 지역사회 반유신 운동 지원


노동운동 - 들불야학이 광천공단을 중심으로 야학운동 주도. 1981년까지 운영


노동조합 운동 - 박정희 사후 로케트건전지, 호남전기 노동조합 등이 빠르게 결성됨


농민운동 - 가톨릭농민회 (이강, 서경원, 장두석) 주도,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 역량 고조


여성운동 - 송백회 (홍희담, 안성례, 김경천) - 초기 옥바라지 주도, 이후 여성운동 관련 역량 고조


교육운동 - 삼봉조합 (윤영규, 양성우, 박석무), 주도 교사들의 모임 형성 이후 양서협동조합 합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 (박관현, 양강섭, 신영일) 등이 주도, 서클 중심에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로 발전


조선대학교 학생운동 (김운기, 유재도, 양희승) 등이 주도,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형성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 -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주도. 지역사회 운동의 흐름 주도


녹두서점 - (김상윤) 주도 학생사회에 이론 공급 및 활동가 양성에 주력


현대문화연구소 - (윤한봉)이 옥바라지 지원 등을 위해 주도, 송백회가 거점으로 활용


 이렇듯, 1971년 광주일고 이념서클 광랑 출신 전남대학교 신입생들의 주도로 급속도로 성장한 광주지역 사회운동 진영은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을 거친 후 분화되어 각 부문운동으로 뿌리내렸다. 운동역량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들은 충장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 YMCA, YWCA, 장동로터리에 위치한 현대문화연구소, 당시 신축이었던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황석영, 문병란 작가의 집, 녹두서점, 들불야학 등을 거처로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다. 1980년대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17. 박관현과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1979년 1월 23일, 들불야학 2기 입학식이 열렸다. 2기 강학은 윤상원, 박관현, 배환중, 전용호, 임낙평, 나상진, 김연중, 배충진, 최영희, 박용안, 김호중, 현수정, 고희숙에 특별 강학 김영철, 박용준까지 15명이었다. 2기부터 학강의 숫자가 대거 증가하여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전세방을 얻어 교실로 사용했다. 그러나 들불야학 2기는 큰 위기를 맞이한다. 시교육청과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전남대 교수들을 통해 강학들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했다. 경찰들의 감시도 삼엄해졌다. 결국 2기는 1, 3기로 나누어 진급하거나 유급해야 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었다.


 당시 광천동 시민아파트에는 김영철과 박용준이 함께 살고 있었다. 김영철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광주 영신원에서 생활했다. 영신원은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보호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공부했고, 당대 호남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였던 광주일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에 갈만한 돈은 없었기 때문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2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회의감을 느끼고 그만두었으며, 군대를 다녀온 후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정착했다. 알고 지내던 김순자와 결혼하여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서경자 원장의 주선으로 YWCA 신협에서 간사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간사로 일하던 박용준을 알게 되었다. 박용준은 고아였다. 그는 태어난 직후 영신원에 맡겨졌다. 박용준과 김영철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박용준이 신협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영철은 박용준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했고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1980년 5월 27일, 두 사람은 함께 전남도청에 남았다.


 들불야학 3기 입학식은 1979년 8월 18일에 열렸다. 윤상원, 박관현, 김영철, 박용준, 임낙평, 박용안, 박효선, 서대석, 정재호, 김경옥, 동근식, 오흥상, 김경국, 이영주, 이성애, 이상 15명이 3기 강학이었다. 당국의 탄압이 거셌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들불야학이 전진하고 있던 1979년. 일부 강학들의 주도로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가 기획되었다. 윤상원, 김영철 등이 함께했고 1기 강학 신영일이 같은 과의 장석웅을 설득했다. 장석웅의 추천으로 고시공부를 준비하고 있던 박관현(법학 78)이 합류했다. 전대학보사 안진 기자는 아예 학보사를 그만두고 왔다. 이들은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한다. 곧 설문지가 완성되었고 광주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받았다. 2달간 진행된 작업 결과 299장의 설문지를 회수하여 결과보고서 작성했다. 1979년 2월 20일,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실태조사를 진행하며 여러 차례 합숙, 철야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조사반원들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해 3월, 학교로 돌아간 장석웅, 박관현, 안진, 신영일 등은 공단 실태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조사 연구회'를 결성했다. 윤상원은 박관현을 들불야학 강학으로 영입했다. 이들은 1년 뒤, 5년 만에 부활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주도한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약화되었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이 다시금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1979년 5월 3일, 전남대학보(현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5차례에 걸쳐 결과를 보도할 예정이었다. 5월 10일에 두 번째 편이 실렸다. 역사상 첫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지역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당 보도를 접한 전남일보 측도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중앙정보부가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3차례의 보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그 일부 내용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광주공단 노동자 50% 이상이 최저임금의 절반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 노동자의 22%가 주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고 있었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63개 업체 중 3개 업체에 불과했다. 해당 실태조사는 광주 지역 노동실태조사의 원조였다. 광주공단이 위치하던 광천동에는 현재 기아자동차가 위치하고 있다. 사법고시에 응시할 생각이었던 박관현은 이 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고 학생운동에 합류했으며, 5·18을 앞두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18.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1979년 8월 9일, YH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YH무역은 1970년대 주력 수출품이었던 '가발'을 생산하는 사업체였다. 이들은 한때 대기업 수출 15위를 기록할 만큼 높은 영업이익을 거뒀다. 노동집약산업인 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고,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항거 이래 노동운동이 성장하자, YH무역에도 노동조합이 태동했다. 그러나 1979년 3월, 사측은 적자와 노조 측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들며 폐업을 공고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노동조합 측은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은 최순영이었다. 그는 훗날 민주노동당 의원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이사장을 역임했다. 곧 당국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야당인 신민당을 찾아가 당사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의 배후에 김영삼이 있다고 판단했다. 저항이 거세질 것을 우려한 당국은 이들을 강경 진압했다. 경찰들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과 농성자들이 심각한 폭행을 당했다. 노동조합 집행위원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사망했다.


 1979년 9월,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며 유신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을 자극했다. 여당은 국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고, 곧 제명안을 가결시켰다. 분노한 신민당 및 야당 의원 69명이 즉각 사표를 내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특히 김영삼의 지지기반이었던 부산 및 마산 지역 민심이 크게 흔들렸고, 1979년 10월 16일 자로 부산 마산 항쟁이 발생했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불과 7개월 후, 광주를 피로 물들이는 3공수여단이 부산에 투입되었다. 1,058명이 체포되었고, 건설노동자 유치준이 사망했다. 훗날, 부마항쟁 진압을 전두환이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79년 10월 9일, 내무부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소위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그해 4월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가를 전전하던 남민전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이 최원석 회장의 집에 들어가자, 경비원이 '강도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차성환이 휴대하고 있던 과도로 경비원에게 상해를 입혔다. 곧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사투 끝에 전남대 활동가 출신 이학영이 체포된다. 이후 고문수사와 유인물 적발 등을 토대로 남민전 조직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의 끝자락, 그 억압을 생각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었다. 남민전을 주도한 건 인혁당 사건 연루자 이재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강대 총책을 맡았던 박석률이 동생 박석삼과 이학영 등 광주 출신 활동가 몇 사람을 남민전에 합류시켰다. 1977년, '파리코뮌' 일본어 강독 모임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를 받고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김남주도 남민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빠르게 조직원을 모았고, 무기를 준비했다.


 이들의 주요 포섭 대상 중 한 명이 바로 광주 운동세력 총책 윤한봉이었다. 김남주가 찾아와 윤한봉에게 남민전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윤한봉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회운동이 대중적 기반 위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국 단위 비밀결사를 결성할 경우 오히려 운동가들을 통째로 독재자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윤한봉은 어떤 위대한 이념도 현실의 토대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청년운동을 주장했다. 윤한봉은 남민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직후 정보망을 가동하여 남민전에 대해 수소문했다. 서울에서 이해찬과 최권행이 운영하던 한마당 출판사를 찾아갔다. 최권행에게 물어보니, 하루를 넘기기 전에 조직의 강령이 손에 들어왔다. 비밀결사로서 전국 각지에 활동가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보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는 광주 천변에서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남민전에는 합류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석률이가 말한 조직은 1년 내로 박살 난다. 보안에 문제가 많은 것 같으니 다들 조심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판단대로, 주지역 활동가들은 남민전 사건을 피해가게 되었고,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한봉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김남주는 감옥에서 긴 시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미 광주를 떠나 서울을 전전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재야인사들은 남민전 사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관련자 임헌영은 "어제까지 동지였던 사람들조차도 차갑게 눈길을 아래로 깔아야 했던 아픈 상처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민전이 전체 사회운동에 끼친 악영향을 이야기했다. 당국은 부마항쟁을 남민전이 배후 조종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관련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실시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군부독재는 여전히 계속될 것 같았다.


19.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1979년 10월 17일 밤, 전남대학교 본부 1층에 위치하던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났다. '상담지도관실'은 군부독재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각 학교에 설치한 감시기구였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했으며, 학내 활동가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그곳에는 학생운동가들의 신상정보도 존재했다. 가히 대학에 위치한 군부독재의 야전사령부가 아닐 수 없었다. 분노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 몇 사람이 상담지도관실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주동자는 고희숙(영어교육 77)과 박유순(철학 77)이었다. 고희숙은 들불야학 2기 강학이었다. 그는 같은 과 동기였던 김정희의 소개로 박기순을 만났다. 이후 박기순과 함께 학습모임에서 공부를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강독했다고 한다. 사회적 현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이어 발생한 6·29 시위 등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기순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이후에는 "언니가 몸 바쳐 헌신했던 들불야학의 빈자리를 나라도 채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다. 군 납품업을 하던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멈추지 않고 활동했다.


 10월 17일, 그날은 7년 전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통해 영구집권을 선언한 날이었다. 고희숙은 동일방직, YH 무역 사건 등으로 유신체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광주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박정희 타도, 유신철폐'라는 내용의 낙서를 곳곳에 적었다. 이후 친한 친구였던 동료 활동가 박유순에게 "평소 경찰들이 상주하며 학생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상담지도관실을 방화하자"라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우리의 교육지표' 지지 시위 이후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었던 기독교 학생회의 후신 '성경연구모임' 소속이었다. 고희숙의 생각처럼, 상담지도관실 방화는 유신체제를 끝내 타도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유순은 본인이 직접 불을 지르겠다고 결의했다. 10월 17일 밤, 그는 휘발유 통을 들고 상담지도관실에 잠입했다. 그는 휘발유 통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 후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화재는  피해를 남기지 않고 끝났다.


 다음날, 상황을 파악한 광주 서부경찰서 측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평소 마크하고 있던 학생운동가들이 빠르게 체포되었다. 18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10명이 구속되었다. 신영일, 고희숙, 박유순, 김경희, 김정희 등이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화재 피해액은 1만 5천 원에 불과했지만, 남민전 사건 발표에 이어 부마항쟁으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당국은 이 사건을 조직사건으로 여기고 고문수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잡혀가자 전남대학교 총장은 학내 방송을 했다. "불순한 학생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이제 안심하고 학업에 열중하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당국은 사건의 배후에 광주 사회운동 세력의 총책, 윤한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부서 형사들은 윤한봉을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이래 3번째 구속이었다. 1979년 10월 17일,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은 무서운 조작 사건의 신호탄이 될 위험성을 품고 있었다.


20. 광주서부경찰서 성고문사건과 박정희의 죽음


 1979년 10월 18일,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으로 구속된 전남대 활동가들은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경찰들은 여성들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남성들을 우선적으로 취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취조란 악랄한 '고문'을 의미한다. 경찰은 며칠 간의 강압적인 조사가 끝난 후에야 박유순과 고희숙이 방화에 직접적으로 연관됐음을 확인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형사 5~6명이 고희숙을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경찰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경찰들은 사건에 대해 물었다. 고희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질문에 답하지 않자, 형사 한 명이 바지를 내렸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보이면서 "순순히 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고 물었다.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다. 그 말을 들은 고희숙은 사건에 대해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여러 사람이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상태에서, 사건에 대해 진술하지 않으면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전형적인 성고문이었다. 고희숙은 훗날 재심청구서를 통해 광주서부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대해 명백하게 밝혔다. (현 광주 북구 용봉동은 1979년 당시 광주 서구 용봉동이었다).


 그러나 박유순과 고희숙이 사건의 전모를 밝혔음에도, 형사들은 그들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건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윤한봉이가 시켰지?"라는 질문이 반복됐다. 윤한봉은 1979년 10월 23일부로 체포돼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왔다. 그가 체포되기 전부터 서부경찰서 조사실에는 물고문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그는 조사실에 끌려가자마자 온몸을 결박당했다. 곧 끔찍한 물고문이 시작됐다. 물에는 화학약품이 들어있었다. 묶여있는 상태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발버둥을 치자 허리를 비롯한 온몸에 부상을 입게 됐다. 형사들은 얼마 전 발표된 남민전 사건과의 연계성을 물었다. 전남대 방화사건 배후 조종 여부에 대한 진술을 요구했다. 3일간 지독한 고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고문이 끝나면 바닥에 널브러졌고, 형사들은 그의 다리에 수건을 깔고 잠을 청했다. 화약약품 때문에 온몸이 가려웠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에 있는 듯했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체포된 지 5일째 된 이날은 형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형사 한 사람이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면서 "다 같은 국민이고 나라 걱정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제? 몸은 좀 어때?"라고 물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건넸다. 윤한봉은 처음에는 또 어떤 고문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생각했다. 곧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그는 벽에 기댄 후 "나라가 걱정돼"라고 말했다. 그때, 실내 방송이 들렸다. "유고계엄령‥". 그 짧은 두 단어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박정희가 죽었구나!" 1972년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이래 지난 7년간의 세월이 불현듯 스쳐갔다. 이제 세상이 바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로 고문은 더 이상 없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석방된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됐다. 곧 집행유예가 떨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세 발의 총에 의해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18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오던 박정희의 심장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광주 사회운동 세력에게 박정희의 유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었다. 녹두서점에 있던 김상윤도 곧 소식을 접했다. 라디오를 함께 듣고 있던 윤강옥은 기쁨에 날뛰며 "박정희가 뒈져버렸다!!"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이제 세상이 바뀐다" 전날까지 서부경찰서에서 고문을 받고 있던 윤한봉의 감상이었다. 1971년, 전남대학교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의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 이래,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며 성장해온 광주 운동세력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앞으로 휘몰아칠 역사의 거센 파고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980년이 다가왔다.


<참고문헌>


  [서적]

  녹두서점의 오월 :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지음

  레즈를 위하여 : 황광우, 장석준 지음

  윤한봉 평전 : 안재성 지음

  스물두 살, 박기순 : 송경자 지음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 황광우 지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판결문


  [논문]

  반유신운동의 효시, 전남대 함성지 사건 : 박석무 작성

  1970년대 광주일고 이념서클에 관한 연구 : 황광우 작성

  오월광주항쟁의 송백회운동에 관한 연구 : 이윤정 작성

  유신체제기, 광주 전남 교육민주화운동의 재조명

  (삼봉조합과 양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 이영재 작성

  1971년 전남대 지하신문 '녹두'와 1970년대 중후반 광주의 앰네스티 운동 : 박석무

  긴급조치 9호 시기 (1975~1979)의 지역사회운동 : 정용화 작성


  [구술]

  윤한봉 구술 회고 :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정현애 회고 : 오월의 광주 팟캐스트 출연분 참고

  김상집 회고 : 오월의 광주 팟캐스트 출연분 참고

  이강 회고 :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오월 전사 前史 이야기 마당) 녹취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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