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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06. 2019

1970년대 초반, 광주 운동세력의 맥이 형성되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③

 엄혹했던 1970년대, 독재정권은 시민들의 삶을 차츰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군대의 억압이 사회를 휘감고 있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러나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선포하자 이강과 김남주는 "독재자의 복마전(소굴)을 향해 총궐기 하자!"며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그즈음 광주에는 독재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바꿀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4.19 혁명, 6.3 한일협정 반대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금 더 본격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특히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이 같은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1970년대 초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한 건 1971년에 설립된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민사련)'이었다. 민사련의 주축은 당대 호남 최고의 명문이었던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14기 졸업생들이다. 정상용(법학 71), 이양현(사학 71), 김정길(경영 71), 문덕희(수의학 71), 박형선(축산 71) 등이 주축이 되었다. 민사련은 전남대학교 역사상 첫 사회과학 서클로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광주일고 졸업생으로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윤한봉은 광주일고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광주일고 교정에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있어요. 일고생들 이 탑을 긍지로 알지. 광주 학생운동의 본거지라는 거여. 그런 곳인데 그 역사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누가 한번 학문적 접근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 수량화할 수 없는 엄청난 거예요.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학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일제하에도 독서그룹이 있어가지고."


 1929년, 3·1 운동 이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만주까지 확산되었다. 그해 11월 3일, 분노한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明治)절 행사장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다. 광주여고보 일부 학생들도 합류했다. 이후 조선 팔도 198개 학교 5만 4천 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해방 직후, 광주고보는 광주일고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교정에 세워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광주에 끼친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박형선의 여동생이자 들불야학 창립자 박기순은 전남여고(광주여고보 후신) 재학 시절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여학도 기념비'를 보고 교지에 글을 남겼다. "우리 어찌 잊으리 조국의 자유 외치던 언니들의 외침을! 학생운동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전남여고와 더불어 그대(기념비)는 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그 시절 광주일고에는 이념서클 '피닉스'와 '광랑 光郞'이 있었다. 광주고에는 박석무가 한때 참여했던 '녹번'이 있었다. 이중 광랑 출신들은 전남대학교에 학생운동을 이식했다. 일제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용근이 광주일고 교사로 학생들에게 큰 영향끼쳤다. 문병란 시인도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모임을 진행했다. 최병근 교사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학내에 배포했다. 1973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을 확산시킬 것을 우려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기념일 목록에서 학생의 날을 삭제했다.


 1971년, 윤한봉이 전남대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다. 그는 1970년대 광주의 사회운동을 설명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윤한봉은 광주일고를 졸업한 후 한동안 방황했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최전방인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 주둔하는 12사단에서 군생활을 했다. 원래 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군 복무는 김신조 일행의 박정희 암살 시도 (1·21 사태)로 6개월 연장되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만학도로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윤한봉은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유명한 모범생이 되어 A학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학내 구성원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1971년 10월, 민족사회연구소가 송정민(영문 68)이 주도하던 학내 서클 'ACR'과 함께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를 열었다. 전남대학교 본관 건물 앞이었다. 학생들이 모였고 주동자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한봉은 우연히 시위를 목격하게 되었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깊은 울림을 받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경찰의 출동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민족사회연구소 주요 구성원들은 이 사건으로 강제 징집당했다. 이후 민족사회연구소는 '교양 독서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교양 독서회의 회원으로는 유선규(수학교육 72), 이훈우(경제 73), 오국영(사학 72), 오재일(법학 72), 박형선, 문덕희, 김정길 등이 있었다.


 1년 뒤인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윤한봉은 유신쿠데타를 접한 직후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다.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 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 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 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 된 거지"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윤한봉은 10월 유신을 계기로 활동가의 삶을 다짐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다짐을 지켰다. 그는 곧 농대 활동가 박형선과 문덕희를 만나 교양 독서회에 합류했다. 윤한봉은 고심 끝에 자신의 첫 활동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바로 '학생회장 선거'였다. 그는 신뢰하던 지인이었던 민상홍을 설득해 농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했다. 민상홍은 농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윤한봉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초반, 광주 사회운동의 맥이 형성되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교양 독서회와 농과대학 학생회가 주축이었다. 1971년, 6.3 한일협정 반대운동 세대인 박석무와 함께 반유신 유인물 '녹두지'를 배포하기도 했던 송정민의 ACR(analysis, criticism, research), 삼민회(김용래 주도), 그린트리(이정호 주도) 등의 그룹도 함께 했다. 이학영(국문 71), 김현장(조선대 금속공학 71), 윤강옥(사학 71), 박석무와 자주 교류했으며 걸출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있던 김상윤(국문 68) 등의 학내 활동가들도 다각도로 교류했다. 이강과 김남주의 '함성-고발지' 사건으로 교양 독서회, 삼민회, 그린트리의 공동 반유신 학내 집회 계획이 무산되고 구성원들이 구속되는 사태도 발생했지만 이들은 1974년 초까지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여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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