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2일, 박정희 유신쿠데타에 대한 첫 집단적 반발이 터져 나왔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생회가 교정에 위치한 4·19 기념탑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법과대학을 향해 행진했다. 그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분연히 일어섰다. 이내 경찰이 출동했고 학생 180명이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법과대학과 상과대학도 연이어 시위에 나섰다. 경북대, 서강대, 이화여대의 대학생들도 독재타도를 외치며 궐기했다.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신일고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이로부터 한 달 전, 전남대학교에서도 반 유신 시위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주동자였던 윤한봉과 박형선이 시위를 앞두고 각각 화엄사와 송광사 근방여관에 연금되어 버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따른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해당 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인권의 원칙 '영장주의'를 짓밟아버렸다. 유신체제에 반대하거나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것만으로 군사재판을 받고 구속될 수 있는 무서운 조치였다. 헌법을 짓밟은 독재세력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주장을 '헌법 반대'로 규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전국대학생들은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주도할 필요성을 느꼈다. 거기에는 4·19 혁명 당시의 전국적인 시위 경험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김정길에게 서울 활동가 나병식이 찾아왔다. 나병식은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시위 주동자였다. 그는 "전국동시다발 시위를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김정길은나병식에게 윤한봉을 소개해주었다. 윤한봉은 서울에서 온 이철, 나병식, 황인성을 만났고 함께 유신에 대항하자고 뜻을 모았다. 윤한봉은 호남 지역담당자가 되었다.
윤한봉은 김상윤(국문 68)을 만나전남대학교 학내 반유신 시위를 제안했다. 당시 학내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론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맡고 있던 김상윤은 함께 시위를 실행할 주체들을 발굴했다. 윤강옥(사학 71), 이학영(국문 71), 김정길(경영 71), 문덕희(수의학 71), 박형선(축산 71), 유선규(수학교육 72), 최철(농업경제 71) 등이 시위 준비에 합류했다.윤강옥이 삼고초려 끝에 포섭한 이훈우, 하태수 등의 새로운 멤버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일정한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선언문 배포를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강령을 비롯한 조직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민청학련은전국 단위 시위를 준비하는 임의단체로 조직으로 발전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1974년 3월 13일, 윤한봉은 대전에서 황인성(서울대), 임규영(경북대)을 만나 경북대와 영남대의 시위 계획을 들었다. 윤한봉이 절치부심 노력했지만 전북대 주체가 발굴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3월 23일, 윤한봉은 선언문 작성에 들어갔다. 곧 선언문이 완성되었고 박형선, 문덕희, 최철 등과 모여 등사기로 유인물을 제작했다. 마침내 자유수호구국 비상광주학생총연맹 명의의 ‘자유수호구국선언문'이 준비되었다. 유인물 인쇄가 진행되고 있던 3월 26일, 김상윤은 부산 구포역 인근에서 열린 비밀회동에 참석했다. 민청학련은 1974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동시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러나일부 구성원의 활동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되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이라는단체가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고 국가체제 전복을 시도한 정황을 포착했다", "관련자들을 사형,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중앙정보부는 반유신 시위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존재한다고 발표하고 전방위적인 수사에 나섰다. 관련자들이 빠르게 검거되었다. 미검거자들을 대상으로 4월 8일까지 1주일 간의 자수기간이 공고되었다. 261명이 그 기간 동안 자수했다. 전남대 의대생, 전북대생 중에도 자수자가 있었고 호남권 조직도 완전히 노출되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자 윤한봉, 김상윤 등 광주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윤한봉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유서를 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유서를 쓰지 못했다. 윤한봉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수기간에 체포되지 않으면 그다음 날보란 듯이 반유신 시위를 감행하자고 결의했다. 4월 6일, 윤한봉은 잠시강진에 내려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그는 아버지께 "감옥에 갈 각오로 독재정권에 맞서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아버지는 눈을 한참 동안이나 감고 있었다. 잠시 후 "해라, 부디 앞장서지는 마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1974년 4월 9일, 전남대학교에 반유신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윤한봉, 김상윤, 최철, 박형선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계림동에서 전남대로 향하는 스쿨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버스 안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버스가 후문에 정차하자 박형선은 농대로 달려가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들은 곧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학교에 등교한 활동가들은 1교시 타종과 동시에 전남대학교 본관 앞으로 집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교시가 진행 중이던 오전 9시경, 경찰이 느닷없이 교실에 들이닥쳤다.수업을 듣고 있던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유선규는 "유선규가 누구야!"라고 묻는 경찰에게 떳떳하게 "내가 유선규다"라고 외쳤다.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차례로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