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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08. 2019

1970년대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 下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⑤

 소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1,024명이 조사를 받았다. 이중 180명이 구속되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73명도 구속되었다. 가히 1970년대 최대의 시국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구속자 253명 중 전남대학교 활동가는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 김윤환, 문덕희, 박형선, 성찬성, 유선규, 윤강옥, 이학영, 이훈우, 이현택, 정환춘, 최 철, 하태수, 전영천, 박진. 총 18명이었다. 나상기(KSCF), 정찬용(서울대)도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국가폭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18 민주광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전일빌딩 앞에 위치한 '민주의 종'을 본 적 이 있을 것이다. 1974년, 그 자리에는 전남도경 대공분실이 위치했다. 윤한봉과 박형선은 그곳에 끌려가서 1주일 동안 맞았다. 어금니가 산산조각 났다. 두 사람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성지 사건'으로도 구속된 바 있던 김정길은 '김일성 만세'를 적으라고 강요받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다른 관련자들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민청학련 2심 판결문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민청학련 관련 광주 전남 구속자 18명 중 김윤환, 이현택 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조직도에 언급되는 윤한봉, 김정길, 이강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상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박형선, 유선규, 윤강옥, 이훈우, 정환춘, 최철, 하태수는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문덕희, 이학영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전영천, 박진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성찬성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광주에서 활동하는 나상기, 정찬용은 각각 징역 20년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실로 파렴치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이 준비했다고 발표한 무기라고는 '유인물'과 '화염병' 몇 개가 전부였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조직도 윤한봉, 김정길, 이강의 이름이 선명하다.


 재판부는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1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들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피고인이 학생이라는 관점에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조국의 보존과 번영에 배반되는 것이므로 눈물을 머금고 극형에 처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민청학련 사건 최후 변론에 나선 강신옥 변호사는 "유신헌법은 비민주적인 악법이다. 피고인 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싶을 정도의 심정이다"라고 발언했다. 이 말을 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재판장에서 강신옥 변호사를 체포했다. 그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세계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폭거였다.


 광주 출신 구속자들은 구치소에서 '까마귀'로 통용되었다. 이들은 서울 출신 수감자들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한복을 들여오지 못하고 새까만 관복을 그대로 입었다. 아버지가 의사인 윤강옥을 제외한 대부분은 농민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윤한봉은 영치품으로 한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 옷을 입고 나가면 함께 구속된 동지들이 더 외로울까 생각해, 입지 않았다. 알고 보니 광주 활동가들이 '까마귀'라 불린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자 중 한 명이자 이제는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중석(서울대)의 형이 광주 전남 관련자 전원에게 넣어준 영치품이었다. 그날 재판을 받고 있던 관련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한복을 입지 않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1975년 2월 15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석방했다. 일부 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정권 인수' 시도라는 궤변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광주 전남 활동가들도 이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들의 재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상고를 기각했다. 관련자 8명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불과 18시간 뒤인 4월 9일, 즉각 집행되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었다. 대한민국은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보냈다. "유신체제에 대항하려 한다면 너희들도 이렇게 죽일 수 있다" 


경북대학교에 위치한 여정남, 이재문 추모비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1년 전인 1974년 4월 9일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10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자유를 만끽할 틈도 없이 인혁당 관련자들의 소식을 접했다.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윤한봉이 '학생운동의 전설적인 지도라'라 평가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여정남 경북대 총학생회장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인혁당 및 민청학련 관련자 대다수는 대구 경북 출신이었다. 민청학련 조직도에 '서울 지도부'와 함께 '경북 지도부'가 주축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특히 사형에 처해진 8명 중 절반은 대구 경북의 교사, 기자, 활동가였다. 인혁당 사건으로 대구 경북의 민주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점을 5·18이 광주에서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75년, 문교부가 총학생회 폐지와 학도호국단 부활을 선언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이 만들었던 학내 군사조직이다. 학생들이 강제로 학도호국단에 소속되었으며 대학교 총장이 대장을 맡았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자치를 말살하여 학생운동을 완전히 제압하려 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깊은 동면에 들어갔다. 그해 5월,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다시 한번 짓밟았다. 해당 조치는 박정희 사망 직후까지 유지되었으며 양심적 시민 1천 여명이 해당 조치 위반으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들의 소식을 접한 광주 전남 활동가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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