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15일, 광주 전남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남대학교 재학생이었다. 윤한봉은 석방된 직후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 구상을 시작했다. 김정길, 이강, 김상윤, 박형선, 김운기(조선대 경영 70)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든든한 버팀목으로 함성지 사건 변호인이자 지역사회 큰 어른인 홍남순 변호사를 모셨다. 전남대 법대 1회 졸업생이자 첫 사법고시 합격자인 이기홍 변호사도 합류했다. 전남대학교안진오, 송기숙 교수, YMCA 이성학 장로, YWCA 조아라 장로, 천주교 김성용, 조비오 신부, 황석영 작가, 문병란 시인도 함께 해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5·18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게 된다. 그즈음 민청학련 사건에는 연루되지 않았던 김남주가 '카프카'라는 이름의 책방을 열었다. 카프카는 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김남주는 원체 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훗날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되는 황광우는 1975년에 카프카에서 김남주와 만났던 기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선배는 한 움큼의 유인물을 나에게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여 학우들의 책상 속에 넣었다. 나도 형을 따라 전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황광우 역시 광주일고 재학생으로 운동세력에 합류했다. 김남주는 카프카 폐업 이후 서울로 올라가 남민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합류한다. 한편, 19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로 강제 징집되었던 정상용과 이양현 등이 학교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군대 덕에 민청학련 사건을 피했다. 물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대를 피한 사람도 있었다. 이때부터 광주 사회운동은 분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 중심이 바로 1970년대 광주 사회운동의 거목이었던 윤한봉과 김상윤이었다. 황광우는 본인의 저서 '레즈(Reds)를 위하여'에서 그 두 사람을 이렇게 평가한다.
"윤한봉 선배는 광주 전남에서 일어나는 여러 투쟁을 도우면서 후배들에게 실천적 기둥이 되어주었다면, 김상윤 선배는 그 특유의 예리한 논리적 사유의 힘을 가지고 후배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사상적 사조들을 소개해 준 이론적 기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윤한봉은 지역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김상윤, 김정길은 전남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운기의 주도하에 조선대학교에도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5년 뒤, 김운기는 조선대학교 대표자로 5·18에 연루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족사회연구소 후신인 교양 독서회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974년 10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훈방된 오재일(법학 71) 주도하에 새로운 사회운동 동아리 '루사(RUSA)'가 만들어졌다. 루사는 전남대학교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첫 사회운동 동아리가 되었다. 루사는 1975년에 본격적인 조직의 틀을 갖추었고 이재의(경제 75), 송선태(국문 75), 문백란(교육 74) 등이 합류했다. 이재의는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전남대 학보사 편집장 이평의의 동생으로 5·18을 겪은 후 전용호와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가 된다. 1976년에는 박형선의 동생이자 들불야학 창립자 박기순(역사교육 76)이 루사에 합류했다.
1975년에는 정상용과 이양현 주도로 메시아(맷돌)가 만들어졌다. 이세천(국문 74), 김금해(역사교육 74) 등이 합류했지만, 메시아는 얼마 못가 해소되었다. 정상용은 정용화와 함께 전남청년운동연합을 만들었다. 이강과 박형선은 농촌으로 돌아가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합류했다. 이양현은 청계천으로 올라가 현장을 경험한 후 노동운동 주체가 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던 나상기는 석방 이후 광주에 정착했다. 그는 KSCF(기독교 학생회)를 만들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각각 조직이 생겨났다. 맷돌 출신의 이세천, 김금해가 합류했고 박현옥(영문 75), 송경란(간호 76), 김영종(농학 75) 등도 합류했다.
1976년 4월 19일, 4·19를 맞아 전남대학교 기독교 학생회는 유인물 배포를 준비했다. 역사적 기념일을 맞아 학생운동 세력이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하에 경찰들이 각지에 포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류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김영종이 유인물 배포를 시도했다. 그는 유인물을 뿌리려는 순간 체포되었다. '문학부 등나무 시위 사건'으로 회원 8명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자퇴를 강요받았다. 결국 기독학생회는 위기를 맞았고 2년 후에야 다시 활동을 제기할 수 있었다. 광주일고의 또 다른 이념서클 '피닉스' 출신들은 1976년 3월, 전남대학교 사회과학 서클 '독서 잔디'를 만들었다. 독서 잔디는 훗날 전남대학교 총장이 되는 지병문이 주도했으며 이학영(민청학련), 신영일(들불야학), 박용수(화학교육 75)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얼마 뒤 이학영도 서울로 올라가 위장 취업했으며 남민전에 합류한다.
당대의 광주 학생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이념서클 루사, 독서 잔디, 맷돌 등이 주도했으며, 그 배후에 학습을 주도하던 김상윤, 김정길이 있었다. 김상윤은 소그룹 단위의 학습을 통해 활동가들을 양성했고 활동가들은 이후 서클 등에 합류했다. 서클이 하는 활동은 지금의 사회운동 동아리들이 하는 활동과 대부분 일치한다.이들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서적을 함께 공부했고 역사적 기념일에는 행사를 열어 해당 사건의 의미를 공부했다. 박석무(교사), 김상윤 등 이론가들이 학습을 도왔다. 야유회도 진행했고 운동의 방법론도 토론했다. 소그룹 중심의 학습을 천명한 김상윤은 1977년 1학기까지 많은 활동가들을 양성했다. 윤상원(정치외교학 71), 노준현(화학공학 75), 김금해, 김영종 등의 활동가들이 학내에 진출했다. 윤상원은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생각입니다." 그는 졸업 후 잠시 서울 주택은행에서 근무했지만 결국 이 편지 내용처럼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이렇듯, 민청학련의 거센 파고 이후 광주의 사회운동 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한 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생운동(김상윤, 김정길, 김운기), 청년운동(정상용, 정용화), 농민운동(이강, 박형선), 노동운동(이양현, 이학영), 기독교 운동(나상기, 최철)등 각자의 특성을 살린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광주의 운동 진영은 진용을 갖춘 채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