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를 조직한 윤한봉은 광주 전역의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자금 문제였다. 윤한봉은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5월에 열리던 전남대학교 대동제에서 회원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팔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한 학생처장이 한통을 전부 구매했다.
지금은 상상도 안되지만, 윤한봉은 당시 분수대는 없었고 토끼가 가끔 뛰어다녔다는 '봉지 광장'에서 활동가들과 이런저런 학습을 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월부책 장사까지 했다. 민청학련 당시 몽둥이를 휘둘렀던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을 찾아가 "당신들 땜시 복학도 안되고 과외도 못해서 힘들다"며 책을 팔았다. 이어 전남대 총장에게도 찾아가서 책을 팔았다. 총장도 사주었다며 교수들을 만나서 책을 팔았지만 많이 팔지는 못했다. 윤한봉이 2달간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책을 판매한 결과 240만 원이라는 큰돈이 모였다. 그는 훗날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했으며 이를 위해 억대의 돈을 모았는데, 실로 탁월한 수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전남대학교는 광주 서구에 위치했다.
1976년 3월 1일, 긴급 조치 9호로 인해 꽁꽁 얼어있던 한국 사회가 요동쳤다.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함석헌, 김승훈 등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긴급조치 해제, 민주인사 석방, 박정희 퇴진을 요구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윤한봉은 우선 선언문 전문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연락을 돌렸다. 기독학생회 나상기를 통해 캐나다 토론토에서 전충민이 발행하는 '뉴타임스 코리아'에 실린 전문을 입수할 수 있었다. 나상기가 윤한봉에게 마침 기독학생회에서 이걸로 학습을 하니까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소는 신광교회였다.
4월 3일, 윤한봉은 신광교회에 가서 기독학생회 구성원들에게 '민주구국선언문'을 읽어주었다.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들이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멀쩡해가지고 있으니까 영 그렇다"는 등, 구성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이 자리에는 김영종, 송경란, 이세천 등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있었다.
1976년 4월 19일, 윤한봉이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4·19도 되었으니, 교정을 거닐고 싶었다. 당시 인문대학 (문리대)에 묘가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있자 윤한봉을 알아본 재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날 학교에는 역사적 기념일을 맞이하여 학생운동 세력이 움직일 것을 우려한 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다가와 "오늘이 4월 19일이기도 하니까 걱정이 된다. 학교에서 좀 나가 달라"라고 요구했다. 윤한봉은 "잘못한 게 있으면 잡아가라"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기독학생회 김영종이 그날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체포되었고 윤한봉은 문제를 키우지 않기 위해 우선 자리를 피했다.
김영종은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심각한 고문을 당했고,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윤한봉을 감추는데 실패했다. 그는 "윤한봉 선배가 민주구국선언을 알려주었고 원로들이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윤한봉은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민주구국선언문도 압수되었다. 윤한봉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1977년 12월 9일 자로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0개월간 감옥에 있었다. 훗날 이 사건은 '부활절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부활절과 관련이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