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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09. 2019

겨울공화국 필화사건, 표현의 자유를 짓밟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⑧

 1975년 2월 12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 촉구'가 핵심 취지였다. 이로부터 3일 뒤, 박정희는 민청학련 관련자 대다수를 석방하는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그런데 기도회 때 낭송된 한 편의 '시'가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다. 당시 광주 중앙여고 교사였던 시인 양성우는 이 자리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 '겨울공화국'을 발표했다.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겨울 공화국 -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걸 웃어대거나 웃다가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은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길지만, 전문을 수록했다. 이 시는 유신체제의 압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태를 파악한 중앙여고 측은 양성우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양성우는 이를 거부했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분노한 중앙여고 학생 10여 명은 돈을 모아 1975년 2월 20일 자 동아일보 광고판에 "가라 껍데기는 가라! 광주 중앙여고 학생들"이라는 광고를 냈다. 1974년 10월 24일, 언론인 송건호가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자 분노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 광고면은 백지로 발간되었고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워주었다. 일명 동아투위 사건이다. 중앙여고 학생들은 양성우와 동아일보를 통해 억압에 저항했다.


 이틀 뒤에는 "혹시 선생님은 교사 노예가 아니신지요(?) 광주 J여고 대다수 학생"이라는 내용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시민단체들도 양성우 지키기에 나섰다. 그러나 4월 12일 자로 파면 징계가 확정되었다. 중앙여고 학생 700여 명은 수업 거부로 양성우 교사에 대한 파면 징계에 항의했다.


 1975년 4월 12일, 파면당한 양성우는 굴하지 않고 광주 YMCA 무진관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겨울공화국'이 다시 한번 낭송되었다. 양성우는 학교를 떠난 후에도 시 '노예수첩'을 썼다. 그의 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좌파 계열 잡지 '세카이 1976년 6월호'에 실렸다. 정보를 찾는 게 힘겨웠던 시절, 세카이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당사자 인터뷰를 보도하는 등 한국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당국은 양성우의 시가 해외 잡지에 실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1977년 6월,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양성우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시 '노예수첩' 발표와 함께 시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를 지인들에게 배포한 일도 문제가 되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표현의 자유'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1980년 5월 19일, 전날 광주 대학생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중앙여고 학생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 시위를 주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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