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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2. 2019

1977년 여름 김상윤, 녹두서점을 열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⑨

 1977년 7월, 광주 계림동에 ‘녹두서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은 김상윤이었다. 이 서점은 훗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한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김상윤은 석방 직후부터 활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윤상원, 노준현, 김영종, 김금해를 비롯한 걸출한 활동가들이 그가 만든 학습 소모임을 거쳐갔다. 전남대 졸업 후 서울 CBS에서 근무하고 있던 송정민이 매달 3만 원을 보내 모임을 도왔다. 1년 6개월 간의 모임 운영을 마친 김상윤에게는 새로운 기획이 있었다. 운동진영에 이론을 보급할 거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계림동에 작은 책방을 개업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가 장두석이 계림신용협동조합을 통해 100만 원을 융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문병란 시인이 '녹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에 걸맞게 전봉준 장군의 초상화가 서점에 걸렸다.

     

 녹두서점은 곧 광주 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거점이 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적을 상실한 사람들이 자주 왔고 전남대, 조선대 활동가들도 새로운 책이 들어온 건 없을까, 녹두서점을 기웃거렸다. 김상윤이 서울에서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오는 날에는 녹두서점에서 자연스레 정모가 열렸다. 녹두서점에는 2개의 방이 있었다. 서점과 이어진 앞쪽 방이 있었고 그 뒤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1971년, 민족사회연구소 주도의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로 강제 징집되었던 이양현이 뒷방을 차지했다. 그는 제대한 후 청계천으로 올라가 청계노조 노동교실에 관여했으며 이후에도 노동운동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녹두서점에서 애인 선점숙과 동거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훗날 함께 전남도청을 지키는 이양현과 윤상원은 서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김상윤을 장난스레 채근하고는 했다.


 1977년 10월, 김상윤에게도 운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중학교 교사 정현애였다. 그가 서점을 두리번거리자, 김상윤이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물었다. 정현애는 “리영희 교수의 8억 인과의 대화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금서를 찾고 있다는 말에 서점에 있던 김상윤과 윤상원은 당황했다. 그들은 “정선자의 소개를 받고 왔다”는 말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현애와 정선자는 전남여고 동창이었다.


 1974년 2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함께 석방된 김지하 시인이 옥중수기 ‘고행 1974’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그는 석방된 지 27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다. 이때 김지하가 옥중에서 겨우 사회로 내보낸 문장들이 ‘양심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정선자는 이화여대에서 해당 문건을 배포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살아야 했다. 학교에서 제적된 정선자는 사법고시 준비생 김이수와 결혼했다. 김이수 역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초를 겪었다. 정선자는 복학 후 이화여대 최초의 기혼자 졸업생이 되었다. 1980년 5월 이후 정선자의 집은 한동안 5·18 관련자들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이수는 군법무관으로 5·18 재판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시신 검시 업무에 동원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도 진행했다. 아내가 5·18 관련자를 숨겨주고 있는데 남편은 그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다니 실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김이수는 1심 판결에서 5·18 관련자 배용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 광주고속버스기사 배용주가 ‘차량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배용주가 운전하던 버스 내부로 들어왔다. 배용주는 차량을 버리고 자리를 피했다. 배용주의 버스는 경찰 저지선에 충돌했고, 이 사고로 경찰관 4명이 사망했다. 불운한 사고였다. 배용주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7년,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받은 김이수는 국회 청문회장에서 배용주와 재회했다. 김이수는 자신의 판결을 사과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1977년 12월, 정현애가 또 녹두서점에 왔다. 그날 김상윤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정현애에게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현애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달라”고 고백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무모한 청혼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현애가 더 무모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1978년 11월에 결혼했다. 김상윤의 회고다. 이후 두 사람은 40년을 넘긴 현재까지 백년해로를 이어가고 있다.


 1980년 5월, 녹두서점은 시민군 상황실이 되었다. 그곳은 사랑방이었고 회의실이었다. 광주 전역에 뿌려진 유인물과 현수막 대부분이 녹두서점에서 만들어졌다. 홍성담은 10일 동안 녹두서점에서 글씨를 썼다. 김상윤, 정현애 등 녹두서점 가족 여섯 사람이 5·18에 연루되었다. 김상윤은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고, 남동생 김상집은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여동생 김현주는 장두석이 만드는 양서협동조합 간사로 일하던 중 항쟁에 가담했다. 김현주의 남편 엄태주도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정현애는 5·18 당시 10일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항쟁 직후 구속자 가족들을 규합하여 5·18 이후의 오월 운동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전력에 다니던 여동생 정현순도 5·18에 가담하여 10일간 녹두서점을 지켰다.


 최근 ‘녹두서점의 오월’이라는 책이 나왔다.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세 사람이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5·18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정현애 선생님을 만나 녹두서점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적이 있지만, 책을 통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글에 나오는 녹두서점 이야기는 대부분 그 책에서 알게 된 내용들을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한 5·18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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