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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3. 2019

윤한봉, 박정희 암살을 고민하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⑩

 1977년 겨울, 윤한봉은 대구교도소에 있었다. 그곳에는 28년째 수감 중이던 비전향 장기수도 있었다. 그는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윤한봉에게 감옥은 좋은 학교였다. 그는 여러 책들을 섭렵하며 이론무장을 강화했다. 함께 징역을 살던 최열은 환경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출소 이후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환경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윤한봉도 역사를 시작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출소를 앞둔 어느 날, 박형선이 찾아왔다. 농대 동기였던 박형선은 어느새 윤한봉의 여동생 윤경자의 애인이 되어있었다. 박형선은 영치품으로 책 한 권을 넣어주었다. 윤한봉은 박형선이 창문 너머로 손 흔드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박형선이 넣어 준 책은 며칠 뒤에야 윤한봉에게 전달되었다. 의아했다. 책은 알렉세이의 ‘뿌리’였는데, 쎄한 느낌이 들어 책을 자세히 살펴보자 문장 사이에 글자가 숨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조합한 결과 조.직.의.명.령.이.오.어.서.나.오.시.오.하.마.참.새.재.비 라는 문장이 나왔다. 윤한봉은 볼펜으로 글자들을 지웠다. 그러나 책을 넣어주기 전에 확인을 안 해볼 교도소 측이 아니었다. 미리 이런 문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당국이 윤한봉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책을 넣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직사건’을 예감했다. 윤한봉은 대구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양팔이 묶였고 백열등이 눈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조직의 실체’를 물었다.

 억울한 일이었다. 박형선은 윤한봉이 괜한 고집을 부려 감옥에 남게 될 것을 염려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윤한봉이 받았던 징역 15년이 ‘집행정지’되었을 뿐 법적 효력은 남아있었다. 이미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징역을 다시 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박형선, 정상용을 비롯한 윤한봉의 동지들은 그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고집스러움을 알았기 때문에 독재와 싸우더라도 나와서 싸우자는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마, 참새, 제비는 정상용, 박형선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광주 요시찰 대상들의 소재를 파악하던 중앙정보부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형선, 김정길, 정상용, 김남주 등 평소 감시하고 있던 대상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또 큰 일을 벌이겠다고 생각한 중앙정보부는 조직역량을 총동원하여 소재 파악에 나섰다.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윤한봉은 독방에서 자결을 시도했다. 도구를 찾을 수 없어 최선을 다해 벽에 머리를 박았다. 한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실 윤한봉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박정희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법살인으로 8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군부독재를 가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광주 운동세력은 유인물과 단편적인 시위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상용, 이양현 등 민청학련에 연루되지 않고 강제 징집되었던 활동가들과 훗날 남민전에 연루되는 조개석, 김남주 등 소수의 멤버를 모아 비밀스럽게 거사를 준비했다. 그즈음 민족사회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정용화가 입대한 후 하필 청와대 경호실로 배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용화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시위 준비를 도왔다. 그러나 구속된 사람들이 정용화의 이름을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에 그는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훗날 윤강옥은 "진술과정에서 너는 완전히 뺐었다"고 전해주었다.


 1976년 여름, 이양현과 정상용이 청와대로 면회를 왔다. 정용화는 "독재자 박정희를 암살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급히 휴가를 내고 광주에 내려왔고 이양현, 정상용, 김남주, 김정길 등과 회동했다. 장소는 김정길이 마련한 사랑방 '봉선동 산채'였다. 녹두서점, 윤강옥의 집, 봉선동 산채 등이 당대 활동가들의 거점이었다. 이미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수류탄 3정이 구해져 있었다. 6·25 전쟁 종결로부터 2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일부는 군부대에서 몰래 반출했다. 활동가들은 '봉선동 산채'에서 '거사'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적으로 계획은 보류되었다. 독재자는 죽어 마땅하지만, 민중 스스로의 힘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끝장을 봐도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1977년 겨울, 중앙정보부는 3일 만에 광주 활동가들의 소재를 파악했다. 사실 그들은 단체로 수련회에 갔었다. 윤한봉은 하마와 참새의 의미를 설명했다. 결국 이번 일은 공안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발각될 것을 우려한 광주 활동가들은 다이너마이트를 낚시하는 데 사용했고 나머지 물건들도 처분했다. 그러나 박정희 18년 독재는 끝내 종국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신의 미궁을 뒤로한 채 1978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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