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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3. 2019

농민운동의 효시, 함평고구마사건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⑪

 1976년, 전남 함평군은 예년보다 훨씬 많은 2만 5천 여 톤의 고구마를 생산했다. 농협이 농민들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해 농협은 함평 농민들에게 고구마 1포대를 1,317원에 구매하겠다고 알리며 고구마 생산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심지어는 광고까지 진행했다. 농민들은 이 말을 믿고 고구마를 대량 생산했다. 그러나 출하 시기가 다가왔지만, 농협은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협에서 나누어 준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길가에 쌓아두었지만, 고구마를 수매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농협은 곧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윽고 고구마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농민들은 고구마를 헐값에 팔아치워야 했다. 피해가 막심했다.


 1976년 11월 17일, 사태를 파악한 농민운동 단체 가톨릭농민회가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보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서경원이 위원장을 맡았다. 가톨릭농민회에는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 이후 농민운동에 뛰어든 이강이 교육부장으로 있었다. 곧 대책위의 피해조사가 시작되었다. 대책위는 총피해액을 최소 1억 4천만 원으로 예상했다. 7,300 가구의 농가가 평균 2만 원대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피해조사를 시작했지만, 조사에 응하는 농가는 극히 적었다. 서슬 퍼런 유신시대였다. 불과 20여 년 전 '나라님에 맞선던 이들'의 최후를 농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이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받아냈다. 결국 대책위의 조사에 응한 건 160여 가구였고, 피해액은 309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1977년 1월 9일, 천주고 광주대교구가 조사 결과를 두고 농협 측에 보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농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곧 탄압이 시작되었다. 4월 22일에는 광주 북동성당에서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농민들은 시위에 나섰지만, 농협 전남지부 진입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후 투쟁의 동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많은 농민들이 대책위를 떠났다. 대책위는 고심 끝에 1978년 4월 24일을 기점으로 마지막 총력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광주 북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우선 700여 명의 농민들이 북동성당에 모여 농민대회를 열었다. 유신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수백 명의 농민들이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개최한 것만으로 위대한 전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밤, 농번기라는 계절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고 73명이 남아 단식에 돌입했다. 1977년 12월 9일 자로 출소한 윤한봉, 그리고 황광우, 조계선, 박형선 등 광주 활동가들도 이들에 대한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윤한봉은 단식을 지원하기 위한 물건부터 모았다. 북동성당 측의 불허와 경찰의 탄압 때문에 치밀한 준비 없이 과감하게 단행한 단식투쟁이었다. 그는 문병란 시인의 집에서 솜이불, 수건 등을 비롯한 생필품을 죄다 끌어모았고 곳곳에서 물건들을 공수했다. 경찰이 북동성당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담벼락을 넘어 물건들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평소 어마어마한 양의 식사를 하는 농민들에게 갑작스러운 단식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연명도 중대한 과제라는 조계선의 주장에 따라 미숫가루도 몰래 반입했다. 이후에는 농민들의 단식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가 기획되었다.


 한편, 함께 단식을 하던 활동가들도 있었다. 이강은 사건이 끝나는 시점까지 단식에 함께했다. 단식이 3일째 되는 날, YWCA의 조아라 장로가 찾아왔다. 조아라는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 후 지원연설을 시작했다. 조아라 장로. 일제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도 신사 참배 거부로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던가. 조아라 장로가 배고픈 다리에서 아이를 엎고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농민들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엉엉'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강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 조아라 장로를 돌아가실 때까지 존경했다고 회고한다. 조아라 장로는 일흔 가까운 나이에 5·18에 연루되어 또 1년여간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석방 후 5·18 진상규명과 관련자 지원에 헌신했다. 연설을 들은 농민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결의를 다졌다.


 광주의 '운동선수'들도 외부적인 지원을 위해 총집결했다. 이들은 매일 북동성당 앞에서 연대집회를 열었다. 단식이 4일째 되는 날에는 YWCA에서 북동성당까지 행진을 했다. 이미 전국적인 사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경찰의 봉쇄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고 북동성당에 집결하여 '고구마 피해 보상하라!', '유신체제 물러가라!', '농민운동 탄압 즉각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성당 내부에 있던 단식자들은 큰 힘을 받았다. 이강은 윤한봉이 외부 총책을 맡아 집회를 진두지휘 했었다고 회고한다.


 단식 4일 차인 4월 27일,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한 당국이 해결에 나섰다. 만나서 협상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가 중재를 맡았다. 당국 측에서는 고건 전남도지사, 중앙정보부 전남 국장 김광호, 농협 전남지부장, 전남도경국장 등 5명이 나왔다. 가톨릭농민회 측에서는 전국본부 이길재, 전남본부 서경원, 2대 대책위원장 임정택, 노금노, 이강 등이 나왔다. 김광호 국장이 농협 전남지부장에게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보소"라며 농협 측 입장을 요구했다. 농협 측이 입장을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고건 도지사가 "그러면 309만 원 중 100만 원을 받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건 어떠냐"며 합의를 종용했다. 분노한 서경원이 입을 열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 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고건 도지사님은 최연소 행정고시에 최연소 도지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배우셨다는 분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셔야 쓰겠습니까. 법적으로 봤을 때 이 같은 피해를 협상으로 흥정해서 해결하는 게 맞습니까?" 이강의 회고에 의하면 서경원은 고건의 이력을 날짜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며 언급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고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경원이 피해보상금을 전달하고 있다.

 

 결국 당국은 309만 원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두 손 두 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식은 구속자 석방과 보상금 즉시 지급을 요구하며 9일 차인 5월 2일까지 이어졌다. 농협 측은 농민들의 피해를 전액 현금으로 보상했다. 사건 직후 감사원은 농협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돌입했다. 조사 결과 농협이 고구마 수매자금 80억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농민들에게 고구마를 값싸게 구매한 후 문서에는 더 높은 금액을 기재하는 방식이었다. 농협 임직원 659명이 해직되었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농민운동사에 위대한 승리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해방 이후 터져 나왔던 농민들의 투쟁이 총칼로 짓밟혔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실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한편, 윤한봉은 마지막까지 철저했다. 그는 사건 직후 동지들과 함께 북동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70명이 사용한 침구류를 일일이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성당 기물들도 철저히 정돈했다. 윤한봉은 농민들의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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