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발표한 한 장의 선언서가 광주를 뒤흔들었다. 선언의 이름은 '우리의 교육지표', 박정희 군사교육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1968년에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황광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해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박정희의 졸개들이 작성한 국민교육헌장을 찢어버렸다. '우리의 교육지표'에 서명한 것은 명노근,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홍길, 홍승기, 이석연, 김두진, 김현곤, 김정수, 배영남. 총 11명이다. 원래는 전남대 김동원 교수도 함께 결의했지만, 그의 가족 중 좌익 경력자가 있어, 누명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판단하에 서명에는 빠지게 되었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원래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의 교수들과 함께 발표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 교수들의 서명이 모이지 않았다. 이에 전남대 교수 11명이 먼저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전남대 송기숙 교수는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통해 AP통신, 아시히 신문 등 외신에 선언서를 전달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서명에 참여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을 체포했다. 역시 엄혹한 유신시대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가장 먼저 나선 건 기독교 학생회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교수 배영남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후 1시부터 전남대학교 봉지 광장에서 '연행된 교수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주동자는 이영송(국문 76), 노준현(화학공학 75), 박현옥, 안길정 등 회원 20여 명이었다. 이날 기도회는 큰 충돌 없이 끝났다.
그날 밤, YWCA에서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리의 교육지표'가 배포되었다. 한편, 전남대학교 활동가들은 이황(이강의 동생)의 자취방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노준현, 정용화, 박석삼, 박몽구, 김윤기, 조봉훈, 김선출, 안길정, 박현옥 등이 모였다. 이들은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노준현이 주동자를 맡았고 박몽구가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김상윤, 윤한봉과 함께 학습을 했던 전남대 활동가들이었다. 작성한 선언문은 YWCA 측을 통해 인쇄를 맡겼다. 다음날인 6월 29일, 김선출이 택시를 타고 유인물을 찾아왔다. 이윽고 활동가들이 각 단과대학에 유인물을 배포하고 '중앙도서관으로 모이자!'고 외쳤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준현이 연설과 함께 집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준현은 곧 교직원들에게 끌려갔으며 경찰에 인계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2, 3층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 수백 명이 최루탄을 쏘고 여러 차례 진입을 시도했고 밤늦게까지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다음날, 전남대학교 측은 7월 5일까지의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윤한봉에게 직접 지도받고 있던 박석삼이 문승훈, 박기순과 함께 시위를 주동했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계림동 녹두서점까지 행진했다. 이 시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헤쳐 모여' 전술이 등장한다. 이들은 시위가 경찰에 의해 봉쇄될 경우에 대비, 차기 집결장소를 사전에 공지했다. 충장로 진출에 실패하면, 1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4시에 조선대 정문에 집결하자는 게 이들의 전술이었다. 시위는 성공적으로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되었다. 경찰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유신시대에 가두행진이 광주 전역을 뒤흔든 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윤한봉은 박석삼을 불러 자신이 작성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상황일지'를 서울에 전달하는 중책을 맡겼다. 박석삼은 서울에 가서 백낙청, 성내운 교수를 만나 해당 문건을 전달했다. 이후 그는 수배 대상이 되었고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7월 3일,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우리의 교육지표와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 지지를 표명하며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에 합류하여 활동하던 김운기(금속공학 75)를 중심으로 한 학내 조직이 주도했다. 조선대학교 학생 양희승, 박형중, 김용철, 유재도. 4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그대로 5·18 당시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구성원들이 된다.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 이후 1주일간 이어진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끈질긴 시위로 500여 명이 연행되었다. 1970년대 최대 규모의 가두시위였다. 전남대 재학생 김윤기, 김선출, 노준현, 안길정, 문승훈, 박병기, 박몽구, 박현옥, 신일섭, 이택, 이영송, 정용화, 최동열, 한동철 등 14명이 구속되었다. 박기순, 신영일, 양강섭 등 10명은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YWCA에서 유인물 제작을 도왔던 김경천 간사와 인쇄업자 정호철도 구속되었다.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전원 해직되었으며 송기숙 교수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엄혹했던 유신의 끝자락에 자리한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 사건을 결코 교수들만의 저항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1주일간 500명이 연행될 정도로 끈질기게 지속된 학생들의 저항은 5·18 민중항쟁의 위대한 전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