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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7. 2019

1978년 여름, 들불야학의 탄생

오월, 그날이 올 때까지 ⑬

 1978년 여름, 광주 광천동성당에서 어느 작은 학교의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교의 이름은 들불야학 (夜學),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을 알고, 바꾸어 나가기 위한 변화의 교두보였다. 들불야학을 처음 제안하고 조직한 건 전남대학교 활동가 박기순(역사교육 76)이었다. 그는 대학 입학 직후 사회과학 서클 '루사'에 합류한 후 자연스럽게 활동가가 되었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등 당대 전남대 학생운동 세력의 크고 작은 활동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또한 동료 활동가들에게 전설적인 선배였던 박형선(민청학련)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이강이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구 동생 이런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답했다. 그는 항상 군복 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입었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외형적인 치장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에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실로 주체성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1977년, 박기순은 광주 산수동에서 진행된 꼬두메 야학에 참여했다. 해당 야학은 운동성을 갖춘 곳은 아니었고, 검정고시 공부를 중점으로 운영되었다. 꼬두메 야학은 불과 10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박기순은 그곳에서 야학 운영 방법을 터득했다. 그해 겨울 박기순은 서울로 올라가 노동운동 동향 및 흐름을 파악한다. 특히 서울의 노동야학 '겨레터 야학'을 둘러보고 깊은 울림을 받는다. 1978년, 겨레터 야학 활동가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이 광주에 왔다. 셋은 모두 광주일고 출신이었다. 전복길과 김영철은 서울대 재학생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영영장을 받고 광주에 내려와 있었다. 겨레터 야학 활동가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박기순은 이들을 찾아가 함께 야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뜻을 모았고,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박기순의 권유를 받고 신영일과 임낙평이 합류했다. 최기혁, 김영철은 광주일고 동창 나상진(토목공학 77)을 끌어들였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박기순,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 신영일, 임낙평, 나상진. 여기에 입학식 이후 이경옥이 합류하여 1기 강학은 총 8명이다.


 이들은 함께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강독했다. 해당 저서는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주체로서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교육은 자유의 실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들불야학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진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들불야학에는 강학과 학강이 있었다. 배우면서 가르치며, 또한 가르치면서 배운다. 이러한 새로운 구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실천이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그는 유현종의 소설 '들불'에서 이름을 땄고 '들불'이라는 단어가 '미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도 등장한다며 강조했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박기순의 안은 가볍게 통과되었다. 다음으로 야학을 운영할 장소가 논의되었다. 노동야학에 걸맞게 광주 유일의 공단지역인 광천동에 터를 잡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공간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기순은 주변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톨릭 농민회 장두석이 조비오 신부를 통해 광천동성당 관계자와 연결시켜 주었다. 박기순이 직접 신부를 찾아가 부탁하자,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광천동성당 교리 학습실을 빌릴 수 있었다. 이어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 홍보 결과 35명이 들불야학 1기 학강이 되었다. 1978년 7월 23일, 들불야학이 닻을 올렸다. 광천동 마을 운동가 김영철(동명이인)과 광천동성당 신부가 축사를 했다.


 얼마 후, 박기순은 공장에 취업했다. 취업처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하청업체 동신 강건사였다. 이미 꼬두메 야학을 하던 시절부터 대학은 박기순의 마음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다.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곧 1기 강학 전복길, 김영철이 군대에 입대했다. 새로운 강학이 필요했다. 함께할 사람을 수소문한 결과 전용호, 배환중 등이 대기 강학으로 합류했다. 박기순은 대학 졸업 후 서울 주택은행에 취업했던 윤상원 (정치외교 71)이 광주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은 6개월 만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광주로 돌아왔고 광천 공단에 취업했다. 박기순은 윤상원을 찾아가서 들불야학 참여를 권유했다. 윤상원은 처음에는 박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끈질긴 설득 공세에 탄복하여 대기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는 이날 열린 대기 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1978년 겨울, 들불야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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