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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7. 2019

박기순, 세상을 떠나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⑭

 1978년 12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들불야학 팀이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로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 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박효선은 3기 특별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하여 '문화'를 다루게 된다. 윤상원이 들불야학에 합류하고 두 달 남짓, 들불야학은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뒤풀이를 했다. 윤상원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방을 얻어 백재인 학강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 화정동에 땔감을 하러 갔다. 광주소년원 뒤편 야산에 올라 장작을 모았다. 그날 밤, 박기순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당시 박기순은 오빠인 박형선과 윤경자 부부, 막내 박동준과 함께 주월동 국민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사돈에 해당하는 윤한봉이 자주 집에 찾아왔다. 그날도 윤한봉이 왔다. 박기순이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윤경자는 윤한봉에게 박기순의 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나 곧 박기순이 왔다. 윤한봉은 큰 방에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박기순이 일어나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했다.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박기순이 문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전남대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연탄가스 누출사고였다. 박기순, 그해 스물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우리의 교육지표'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광주 전남 최초로 위장취업자가 되었던 위대한 활동가였다. 그리고 너무나 애석한 죽음이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전남대병원으로 모여들었다. 황망한 소식에 다들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 보낸다고, 통곡하는 들불야학 학강들도 있었다. 위대한 노동운동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이강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박기순의 장례를 준비했다. 영결식 이후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12월 27일, 노동운동가 박기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 광주 전남 지역 활동가들과 들불야학 관계자들이 집결했다. 황석영 작가와 문병란 시인이 조사를 낭독했다. 지난 2월, 박형선과 윤경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한 해를 시작했던 황석영은 박기순의 죽음과 함께 1978년을 마무리하는 현실이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우리의 교육지표'의 홍승기 교수도 조사를 낭독했다.


 "서석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하였습니다. 성탄의 밤은 그렇게도 조용하였습니다. 그 계절의 벼랑에서 저는 너무나도 슬픈,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살아왔습니다. 깊은 골짜기의 쓸쓸함 홀로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당신 앞에서 누가 감히 의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영결식에 참여한 가수 김민기가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민기는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들렀다가 황망한 소식을 접하고 영결식에 참석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친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운구차는 망월동을 향해 느린 걸음을 시작했다. 들불야학이 있던 광천동성당에 들리자 박기순에게 교리 학습실을 내주었던 오수성 미카엘 신부가 영결미사를 진행했다. 이후 운구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을 들린 후 망월동으로 갔다. 박기순은 그곳에 영원히 잠들었다. 박기순의 운구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그 길, 도로는 태극기로 가득했다. 다음날인 1978년 12월 28일, 박정희는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재자는 자신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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