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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19. 2019

광주 여성운동의 뿌리 송백회와 삼봉조합의 형성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⑮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구속된 전남대 교수들의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이들은 털양말과 책을 수감자들에게 넣어주었다. 곧 구속자 가족들 사이에 끈끈한 결속이 형성되었다. 광주 구속자 가족들은 단체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송백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했다. 나혜영이 회장을, 홍희담 작가가 총무를 맡았다. 그해 말, YWCA에서 출범식이 열렸다. 1979년, 윤한봉은 이들과 함께 옥바라지를 진행하기 위해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그곳은 자연스럽게 송백회 회원들의 거점이 되었다. 윤한봉은 동지들에게 "족보, 일기장, 집문서 빼고 책이란 책은 다 가져오라"는 무서운 지령을 내렸고 곧 3천여 권의 책을 사무실에 모았다. 그는 송백회 회원들과 함께 전국의 구속자들에게 책을 전달했다. 책을 다 읽을 때쯤 되면, 새로운 책으로 교환해주었다.


 송백회 구성원들은 초기에는 구속된 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을 시작했다. 1970년대, 당대의 사회운동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칠흑과 같은 '유신'과의 대결이 지상목표였다. 그러나 송백회 회원들은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여성학을 수용하고 일본 기생관광의 실태, 농촌여성의 현실 등에 대한 학습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누군가의 아내로만 기억되지 않았다. 황석영 작가의 부인 홍희담 작가는 5·18을 겪은 후 도청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썼다. 홍희담 작가의 '깃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명노근 교수의 부인 안성례 여사는 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10일간 5·18을 경험했다. 그는 이후 5·18 진상규명 운동을 주도했고 광주시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시의원이 되었다. YWCA 김경천 간사는 16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송백회 회원이었다.


 송백회는 5·18 당시 YWCA를 둘러싼 활동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1980년 3월, 송백회의 추천으로 이윤정이 YWCA 사회문제부 간사가 되었다. 5·18 당시 송백회는 YWCA를 거점으로 움직였고 최후까지 그곳을 지켰다. 5·18 직후 YWCA 조아라 회장과 이애신 총무가 구속되었으며 이윤정, 정유아 간사는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이윤정이 훗날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 '오월 광주항쟁의 송백회 운동에 관한 연구'를 보면, 송백회와 YWCA를 중점으로 당대 여성운동이 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7년, 국제 앰네스티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은 '함성지 사건' 이후 평범한 교사로 살아가고 있던 박석무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6·3 항쟁에 참여했던 전남대 학생운동 1세대였다. 그는 광주 앰네스티 조직에 돌입했다. 곧 함성지 사건 당시 자신을 변호해주었던 이기홍 변호사를 찾아가 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종교계를 비롯한 광주의 재야인사들을 빠르게 조직했다. 천주교 조비오, 김성용 신부, YMCA 이성학 장로, YWCA 조아라 장로, 이애신 총무, 기독교 강치원 목사, 문정식 목사와 알고 지내던 교사들도 합류했다. 박석무 본인은 총무를 맡았다. 광주 재야운동 진영의 대부 홍남순 변호사도 고문으로 모셨다. 1977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선언일에 맞추어 가톨릭센터 5층에서 출범식이 열렸다. 광주 앰네스티는 YWCA를 사무실로 사용했다.


 박석무는 1975년 3월부터 대동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근무하는 대동고 교사 윤광장, 박행삼과 어울렸다. 윤광장은 윤한봉의 둘째 형이었다. 박석무는 곧 광주 전역의 반유신 성향 교사들을 규합하여 비밀모임을 시작했다. 대동고에는 이들 세 사람이 있었고, 중앙여고에도 송문재, 임추섭 교사와 '겨울공화국' 사건으로 해직되었던 양성우까지 세 사람이 있었다. 김준태(전남고), 윤영규(광주여상) 등도 합류했고 함께하는 교사의 숫자는 곧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모임의 이름을 삼봉조합으로 정했다. 삼봉은 화투용어 '고도리'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모임을 열 때면, "삼봉이나 한게임 치러 가자고"하는 연락이 온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면 정세를 토론하고 함께 공부를 했다.


 3년 뒤, 5·18이 일어나자 삼봉 조합원 7명이 항쟁에 연루되었다. 훗날 삼봉 조합원 중 박석무, 윤광장, 김준태, 윤영규 네 사람은 5·18 기념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삼봉조합은 교육운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모임이 형성한 기반은 곧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로 이어졌다. 윤광장은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초대 광주전남지부장을 맡았다. 윤영규는 전교협 의장 및 초대, 2대, 3대 전교조 위원장을 맡았다. 삼봉조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교육운동이 결국 교사들의 전국 조직으로 이어진 셈이다.


 1979년이 되자 광주 지역사회에 각 부문운동이 명확히 자리 잡고 그 역량을 스스로 성숙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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