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1월, 광주 YWCA에 소비자 협동조합, '양서협동조합'이 생겼다. 그러나 해당 단체는 반 유신 운동의 교두보로 기능했다. 양서조합을 처음 제안한 건 신협 활동가 장두석이었다. 그는 신협에서 활동하던 중 가톨릭농민회에 합류하여 농민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해왔다. 김상윤이 녹두서점을 만들 때, 신협을 통해 100만 원을 융자해주기도 했다. 1978년 3월, 장두석은 황일봉에게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서협동조합 광주지부를 만들고자 한다"며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황일봉은 전남대 졸업 후 시민사회운동에 관여해왔던 사람이다. 양서협동조합 결성에 해직된 전남대 교수들과 박석무 등 삼봉조합 교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양서협동조합은 YWCA를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자연스럽게 사랑방 역할을 했다. 김상윤의 여동생 김현주가 간사를 맡았다. 당시 대동고 학생부장을 맡고 있던 박석무의 노력으로 김향득, 박병인과 같은 청소년들도 양서협동조합에 왕래했다. YWCA 서재에 다양한 책들이 쌓여갔다.
윤한봉은 현대문화연구소를 만들었던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어디 가면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곳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약속 없이도 수시로 모일 수 있고, 정보교환할 수 있고 그런데 이게 이를 테면은 75년에는 카프카 서점이 이제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인제 모이고 그랬는데 이게 수가 좀 불어나니까 그런 자리가 마땅치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이름은 애매한 게 좋으니까 '현대문화연구소' 이렇게 해브렀지"
1979년, 광주의 사회운동 세력은 그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1년 후, 5.18의 위대함이 광주시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5월 27일, 항쟁의 완성은 이들이 역사에 뿌려둔 거름으로부터 연원 했다.
<1979년 광주 사회운동 진영>
광주 앰네스티 (홍남순, 이기홍, 박석무) - 구성원들이 1세대 인권변호사들로 지역사회 큰 어른 역할 수행
천주교계 (조비오, 김성용, 윤공희 대주교) -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중간지원 역할 수행
YMCA (이성학, 명노근, 윤영규) - 반 유신 교육운동 주도, 지역사회 반유신 운동 지원
YWCA (조아라, 이애신, 이윤정) - 양서협동조합 등의 거점으로 지역사회 반유신 운동 지원
노동운동 - 들불야학이 광천공단을 중심으로 야학운동 주도. 1981년까지 운영
노동조합운동 - 박정희 사후 로케트건전지, 호남전기 노동조합 등이 빠르게 결성됨
농민운동 - 가톨릭농민회 (이강, 서경원, 장두석) 주도,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 역량 고조
여성운동 - 송백회 (홍희담, 안성례, 김경천) - 초기 옥바라지 주도, 이후 여성운동 관련 역량 고조
교육운동 - 삼봉조합 (윤영규, 양성우, 박석무), 주도 교사들의 모임 형성 이후 양서협동조합 합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 (박관현, 양강섭, 신영일) 등이 주도, 서클 중심에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로 발전
조선대학교 학생운동 (김운기, 유재도, 양희승) 등이 주도,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형성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 -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주도. 지역사회 운동의 흐름 주도
녹두서점 - (김상윤) 주도 학생사회에 이론 공급 및 활동가 양성에 주력
현대문화연구소 - (윤한봉)이 옥바라지 지원 등을 위해 주도, 송백회가 거점으로 활용
이렇듯, 1971년 광주일고 이념서클 광랑 출신 전남대학교 신입생들의 주도로 급속도로 성장한 광주지역 사회운동 진영은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을 거친 후 분화되어 각 부문운동으로 뿌리내렸다. 운동역량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들은 충장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 YMCA, YWCA, 장동로터리에 위치한 현대문화연구소, 당시 신축이었던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황석영, 문병란 작가의 집, 녹두서점, 들불야학 등을 거처로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다. 1980년대가 목전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