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월 23일, 들불야학 2기 입학식이 열렸다. 2기 강학은 윤상원, 박관현, 배환중, 전용호, 임낙평, 나상진, 김연중, 배충진, 최영희, 박용안, 김호중, 현수정, 고희숙에 특별 강학 김영철, 박용준까지 15명이었다. 2기부터 학강의 숫자가 대거 증가하여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전세방을 얻어 교실로 사용했다. 그러나 들불야학 2기는 큰 위기를 맞이한다. 시교육청과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전남대 교수들을 통해 강학들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했다. 경찰들의 감시도 삼엄해졌다. 결국 2기는 1, 3기로 나누어 진급하거나 유급해야 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었다.
당시 광천동 시민아파트에는 김영철과 박용준이 함께 살고 있었다. 김영철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광주 영신원에서 성장했다. 영신원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보호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학업에 임했고, 당대 호남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였던 광주일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에 갈만한 돈은 없었기 때문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2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회의감을 느끼고 그만두었으며, 군대를 다녀온 후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정착했다. 알고 지내던 김순자와 결혼하여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광주 영신원 서경자 원장의 주선으로 YWCA 신협에서 간사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간사로 일하던 박용준을 알게 되었다. 박용준은 고아였다. 그는 태어난 직후 영신원에 맡겨졌다. 박용준과 김영철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박용준이 신협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영철은 박용준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했고 의형제의 연을 맺어 호적에 올렸다. 1980년 5월 27일, 두 사람은 함께 전남도청에 남았다.
들불야학 3기 입학식은 1979년 8월 18일에 열렸다. 윤상원, 박관현, 김영철, 박용준, 임낙평, 박용안, 박효선, 서대석, 정재호, 김경옥, 동근식, 오흥상, 김경국, 이영주, 이성애, 이상 15명이 3기 강학이었다. 당국의 탄압이 거셌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들불야학이 전진하고 있던 1979년. 일부 강학들의 주도로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가 기획되었다. 윤상원, 김영철 등이 함께했고 1기 강학 신영일이 같은 과의 장석웅을 설득했다. 장석웅의 추천으로 고시공부를 준비하고 있던 박관현(법학 78)이 합류했다. 전대학보사 안진 기자는 아예 학보사를 그만두고 왔다. 이들은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한다. 곧 설문지가 완성되었고 광주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받았다. 2달간 진행된 작업 결과 299장의 설문지를 회수하여 결과보고서 작성했다. 1979년 2월 20일,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실태조사를 진행하며 여러 차례 합숙, 철야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조사반원들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해 3월, 학교로 돌아간 장석웅, 박관현, 안진, 신영일 등은 공단 실태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조사연구회'를 결성했다. 윤상원은 박관현을 들불야학 강학으로 영입했다. 이들은 1년 뒤, 5년 만에 부활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주도한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약화되었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이 다시금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1979년 5월 3일, 전남대 학보(현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5차례에 걸쳐 결과를 보도할 예정이었다. 5월 10일에 두 번째 편이 실렸다. 역사상 첫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지역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당 보도를 접한 전남일보 측도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중앙정보부가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3차례의 보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그 일부 내용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광주공단 노동자 50% 이상이 최저임금의 절반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 노동자의 22%가 주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고 있었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63개 업체 중 3개 업체에 불과했다. 해당 실태조사는 광주 지역 노동실태조사의 원조였다. 광주공단이 위치하던 광천동에는 현재 기아자동차가 위치하고 있다. 사법고시에 응시할 생각이었던 박관현은 이 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고 학생운동에 합류했으며, 5·18을 앞두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