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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20. 2019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⑱

 1979년 8월 9일, YH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YH무역은 1970년대 주력 수출품이었던 '가발'을 생산하는 사업체였다. 이들은 한때 대기업 수출 15위를 기록할 만큼 높은 영업이익을 거뒀다. 노동집약산업인 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고,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항거 이래 노동운동이 성장하자, YH무역에도 노동조합이 태동했다. 그러나 1979년 3월, 사측은 적자와 노조 측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들며 폐업을 공고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노동조합 측은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은 최순영이었다. 그는 훗날 민주노동당 의원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이사장을 역임했다. 곧 당국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야당인 신민당을 찾아가 당사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의 배후에 김영삼이 있다고 판단했다. 저항이 거세질 것을 우려한 당국은 이들을 강경 진압했다. 경찰들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과 농성자들이 심각한 폭행을 당했다. 노동조합 집행위원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사망했다.


 1979년 9월,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며 유신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을 자극했다. 여당은 국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고, 곧 제명안을 가결시켰다. 분노한 신민당 및 야당 의원 69명이 즉각 사표를 내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특히 김영삼의 지지기반이었던 부산 및 마산 지역 민심이 크게 흔들렸고, 1979년 10월 16일 자로 부산 마산 항쟁이 발생했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틀 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불과 7개월 뒤에 광주를 피로 물들이는 3공수여단이 부산에서 곤봉을 휘둘렀다. 1,058명이 체포되었고, 건설노동자 유치준이 사망했다. 훗날, 부마항쟁 진압을 전두환이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79년 10월 9일, 내무부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소위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그해 4월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가를 전전하던 남민전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이 최원석 회장의 집에 들어가자, 경비원이 '강도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조직원 차성환이 경비원과 격투를 벌였고 휴대하고 있던 과도로 상해를 입혔다. 곧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사투 끝에 전남대 활동가 출신 이학영이 체포된다. 이후 고문수사와 유인물 적발 등을 토대로 남민전 조직의 전모가 발각되었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의 끝자락, 그 억압을 생각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었다. 남민전을 주도한 건 인혁당 사건 연루자 이재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강대 총책을 맡았던 박석률이 동생 박석삼과 이학영 등 광주 출신 활동가 몇 사람을 남민전에 합류시켰다. 1977년, 활동가들과 '파리코뮌' 일본어 강독 모임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를 받고 서울에서 도피생활 중이던 김남주도 남민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빠르게 조직원을 모았고, 무기를 준비했다.


 이들의 주요 포섭 대상 중 한 명이 바로 광주 운동세력 총책 윤한봉이었다. 김남주가 찾아와 윤한봉에게 남민전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윤한봉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회운동이 대중적 기반 위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국 단위 비밀결사를 결성할 경우 오히려 운동가들을 통째로 독재자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윤한봉은 어떤 위대한 이념도 현실의 토대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청년운동을 주장했다. 윤한봉은 남민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직후 정보망을 가동하여 남민전에 대해 수소문했다. 서울에서 이해찬과 최권행이 운영하던 한마당 출판사를 찾아갔다. 최권행에게 물어보니, 하루를 넘기기 전에 조직의 강령이 손에 들어왔다. 비밀결사로서 전국 각지에 활동가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보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는 광주 천변에서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남민전에는 합류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석률이가 말한 조직은 1년 내로 박살 난다. 보안에 문제가 많은 것 같으니 다들 조심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판단대로, 광주지역 활동가들은 남민전 사건을 피해가게 되었고,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한봉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김남주는 감옥에서 긴 시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미 광주를 떠나 서울을 전전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재야인사들은 남민전 사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관련자 임헌영은 "어제까지 동지였던 사람들조차도 차갑게 눈길을 아래로 깔아야 했던 아픈 상처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민전이 전체 사회운동에 끼친 악영향을 이야기했다. 당국은 부마항쟁을 남민전이 배후 조종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관련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실시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군부독재는 여전히 계속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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