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7일 밤, 전남대학교 본부 1층에 위치하던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났다. '상담지도관실'은 군부독재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각 학교에 설치한 감시기구였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했으며, 학내 활동가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그곳에는 학생운동가들의 신상정보도 존재했다. 가히 대학에 위치한 군부독재의 야전사령부가 아닐 수 없었다. 분노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 몇 사람이 상담지도관실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주동자는 고희숙(영어교육 77)과 박유순(철학 77)이었다. 고희숙은 들불야학 2기 강학이었다. 그는 같은 과 동기였던 김정희의 소개로 박기순을 만났다. 이후 박기순과 함께 학습모임에서 공부를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강독했다고 한다. 사회적 현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이어 발생한 6.29 시위 등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기순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이후에는 "언니가 몸 바쳐 헌신했던 들불야학의 빈자리를 나라도 채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다. 군 납품업을 하던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멈추지 않고 활동했다.
10월 17일, 그날은 7년 전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통해 영구집권을 선언한 날이었다. 고희숙은 동일방직, YH무역 사건 등으로 유신체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광주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박정희 타도, 유신철폐'라는 내용의 낙서를 곳곳에 적었다. 이후 친한 친구였던 동료 활동가 박유순에게 "평소 경찰들이 상주하며 학생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상담지도관실을 방화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우리의 교육지표' 지지 시위 이후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었던 기독교 학생회의 후신 '성경연구모임' 소속이었다. 고희숙의 생각처럼, 상담지도관실 방화는 유신체제를 끝내 타도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유순은 본인이 직접 불을 지르겠다고 결의했다. 10월 17일 밤, 그는 휘발유 통을 들고 상담지도관실에 잠입했다. 그는 휘발유 통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 후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화재는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끝났다.
다음날, 상황을 파악한 광주 서부경찰서 측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현 광주 북구 용봉동은 1979년 당시 광주 서구 용봉동이었다) 그들은 평소 마크하고 있던 학생운동가들을 빠르게 체포했다. 18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10명이 구속되었다. 신영일, 고희숙, 박유순, 김경희, 김정희 등이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화재 피해액은 1만 5천 원에 불과했지만, 남민전 사건 발표에 이어 부마항쟁으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당국은 이 사건을 조직사건으로 여기고 고문수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잡혀가자 전남대학교 총장은 학내 방송을 했다. "불순한 학생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이제 안심하고 학업에 열중하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당국은 사건의 배후에 광주 사회운동 세력의 총책, 윤한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부서 형사들은 윤한봉을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이래 3번째 구속이었다. 1979년 10월 17일,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은 무서운 조작 사건의 신호탄이 될 위험성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