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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23. 2019

광주서부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박정희의 죽음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⑳

 1979년 10월 18일,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으로 구속된 전남대 활동가들은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여성들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들을 우선적으로 취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취조란 악랄한 '고문'을 의미한다. 경찰은 며칠 간의 강압적인 조사가 끝난 후에야 박유순과 고희숙이 방화에 직접적으로 연관됐음을 확인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형사 5~6명이 고희숙을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경찰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경찰들은 사건에 대해 물었다. 고희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질문에 답하지 않자, 형사 한 명이 바지를 내렸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보이면서 "순순히 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고 물었다.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다. 그 말을 들은 고희숙은 사건에 대해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여러 사람이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상태에서, 사건에 대해 진술하지 않으면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전형적인 성고문이었다. 고희숙은 훗날 재심청구서를 통 광주 서부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대해 명백하게 밝혔다(현 광주 북구 용봉동은 1979년 당시 광주 서구 용봉동이었다).


 그러나 박유순과 고희숙이 사건의 전모를 밝혔음에도, 형사들은 그들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건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윤한봉이가 시켰지?"라는 질문이 반복됐다. 윤한봉은 1979년 10월 23일부로 체포돼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왔다. 그가 체포되기 전부터 서부경찰서 조사실에는 물고문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그는 조사실에 끌려가자마자 온몸을 결박당했다. 곧 끔찍한 물고문이 시작됐다. 물에는 화학약품이 들어있었다. 묶여있는 상태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발버둥을 치자 허리를 비롯한 온몸에 부상을 입게 됐다. 형사들은 얼마 전 발표된 남민전 사건과의 연계성을 물었다. 전남대 방화사건 배후 조종 여부에 대한 진술을 요구했다. 3일간 지독한 고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고문이 끝나면 바닥에 널브러졌고, 형사들은 그의 다리에 수건을 깔고 잠을 청했다. 화약약품 때문에 온몸이 가려웠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에 있는 듯했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체포된 지 5일째 된 이날은 형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형사 한 사람이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면서 "다 같은 국민이고 나라 걱정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제? 몸은 좀 어때?"라고 물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건넸다. 윤한봉은 처음에는 또 어떤 고문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생각했다. 곧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그는 벽에 기댄 후 "나라가 걱정돼"라고 말했다. 그때, 실내 방송이 들렸다. "유고계엄령‥". 그 짧은 두 단어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박정희가 죽었구나!" 1972년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이래 지난 7년간의 세월이 불현듯 스쳐갔다. 이제 세상이 바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로 고문은 더 이상 없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곧 집행유예가 떨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세 발의 총에 의해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18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오던 박정희의 심장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광주 사회운동 세력에게 박정희의 유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었다. 녹두서점에 있던 김상윤도 곧 소식을 접했다. 라디오를 함께 듣고 있던 윤강옥은 기쁨에 날뛰며 "박정희가 뒈져버렸다!!"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이제 세상이 바뀐다" 전날까지 서부경찰서에서 고문을 받고 있던 윤한봉의 감상이었다. 1971년, 전남대학교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의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 이래, 함성지, 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며 성장해온 광주 운동세력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앞으로 휘몰아칠 역사의 거센 파고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980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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