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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05. 2019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下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②

 1972년 12월 10일, 박석무는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을 만났다. 정득규는 함성지를 유포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으냐 물었다. 박석무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 답한 후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무관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김정길, 김남주, 고재득, 송정민, 모두 당대의 전남대학교 활동가들이었다. 박석무는 함성지를 이강의 단독 소행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이강과 김남주는 대인시장 한성다방에서 만났다. 이강은 이날 김남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줄담배를 태웠다고 술회한다. 며칠 뒤부터 김남주는 광주를 떠나 서울에 살던 광주일고 동창 이개석의 집에 머물렀다. 함성지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첫 번째 반발로 남게 되었다.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첫 체육관 선거가 12월 23일로 예정되어 있던 시점이었다. 당국은 함성지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다. 사건은 일시적인 미제사건이 되었다.


 1973년 3월, 이강은 제2의 함성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 학기를 맞아 전국적인 반유신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유인물을 전국 대학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김남주에게서 "너무 춥다. 이불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강은 김남주에게 자신의 계획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어 '고발지'라는 이름의 글을 작성한 후 동생 이황과 함께 500장을 인쇄했다. 김남주에게 보낼 이불속에 인쇄용품, 고발지 500장도 끼워 넣었다. 미처 배포하지 못한 함성지 100여 장도 넣었다. 이강은 해당 물품을 이개석의 자취방에 택배로 보냈다. 당대에는 '화물소'를 통해 물건을 보냈다. 고발지 역시 함성지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4·19 혁명의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자유의 적에 대하여는 끝까지 항거하고 피로써 투쟁하는 육신으로 혁명할 것을 선언한다. 제4 공화국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특권층, 단 한 번의 민중봉기로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그러나 경찰은 김남주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강이 김남주에게 보낸 편지를 포착했고, 이불 등의 수하물도 당국에게 적발되었다. 1973년 3월 20일, 이강은 전남도경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전남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박석무와 김남주도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어 이강의 동생 이정, 이황, 애인 이재은, 집안 조카 이정호, 김정길, 김용래, 이평의, 윤영훈, 이개석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김남주에게 반지를 주었던 이경순과 강희순, 김남주의 동생 김덕종도 전남도경으로 끌려왔다. 총 15명이었다. 이들은 전남대 활동가이거나 이강의 지인이었다. 박석무는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6·3 운동 이후 선배 그룹 활동가였다는 이유로 '수괴'로 지목되었다.


 '함성-고발지 사건' 관련자 15명 중 9명 (이강, 박석무, 김남주, 이황, 이정호, 김정길, 김용래, 이평의, 윤영훈)은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다른 6명 (이경순, 강희순, 이정, 이개석, 김덕종, 이재은)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러온 사람들에게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은 학내 서클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교양독서회 (김정길), 삼민회 (김용래), 그린트리 (이정호) 등의 교내 서클들은 1973년 3월 말 4월 초 반유신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함성-고발지 사건이 발각되지 않았다면, 전국 최초의 반유신 시위가 전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체포된 9명의 구속자들은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15명의 관련자는 4월 19일 자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의 유인물 유포가 국가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라는 궤변의 시대였다. 이들은 한동안 광주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어야 했다. 1심 재판 결과 검사는 박석무,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1973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은 박석무, 김남주에게 징역 2년, 이강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수괴'보다 소속원이 더 큰 처벌을 받은 황당한 판결이었다. 다른 구속자들은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의 눈부신 활약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함석헌 선생이 내려와 재판을 2번 방청했으며 국제앰네스티 동경지부에서 영치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1심 판결 이후 법정은 토론장으로 변했다. 12명의 불구속 피고인들과 3명의 구속자들이 열띤 논변을 펼쳤다. 박석무가 "재판이 흥미로웠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구속자들은 진술과정에서 고문 피해가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고문경찰들은 당혹한 표정을 감추며 "아들, 딸 같아 잘해줬지 고문한 적은 없다"고 진술했다. 고문 행위는 엄연한 국가폭력이지만, 이 시대의 법정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1973년 12월 27일, 항소심 재판부는 박석무에게 무죄를, 이강, 김남주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석방되었으며, 소식을 들은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이들을 환영했다.


 동아일보에 짧게 실린 세 사람이 환영받는 사진은 '함성지 사건'에 대한 첫 언론보도였다. 법정에서 대한민국을 대리하는 검사에 따르면, 15명의 청년들이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대한민국 체제전복을 시도했다는 사건이 완벽히 은폐되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불과 두 달 만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은 끝내 은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함성지 사건'을 계기로 광주의 저항세력도 규합되기 시작했다.


 2019년 11월 7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오월 전사 (前史) 이야기 마당'에 이강 선생이 대담자로 참여했다. 그에게서 함성지 사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197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그의 이야기를 2019년에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상당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며칠 뒤인 11월 15일, 필자는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뒤편에 '홍콩 시위' 지지를 표명하는 현수막과 대자보를 게시했다. 홍콩 시민들이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 보고 듣고 배워온 광주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연대의 의미를 담아 현수막과 대자보를 게시했다. 이제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는 '김남주 기념홀'이 위치한다. 그날 현수막을 게시하며 이강과 김남주,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받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두 사람을 계승하는 사람들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날 것이다. 역사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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