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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04. 2019

전국 최초의 유신 저항운동 '함성지 사건' 上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 ①

 5·18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1970년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월, 그날이 오기까지'는 유신헌법이 공표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를 다룬다. 1980년은 그냥 오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국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일명 '유신쿠데타'다. 불과 10일 뒤, 유신헌법이 기존의 헌법을 대체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었고 대통령 연임 제한도 사라졌다.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임기 6년의 대통령에게는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권한이 주어졌다. 이로써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추구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군홧발이 양심을 억누르던 추운 겨울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광주에서 터져 나왔다.


 1972년 12월 9일, 지난 두 달간 휴교 상태였던 전남대학교는 개강 준비로 분주했다. 유신쿠데타 직후 휴교한 대학들이 12월 10일 동시 개학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날 밤, 광주 일대에 유신체제를 맹렬히 비판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유인물의 이름은 '함성지', 주동자는 전남대학교 재학생 이강과 김남주였다. 두 사람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해남중학교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다. 그해 8월, 학점 문제로 고민하던 김남주는 이강에게 "부모님께 위조 졸업장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해남 본가로 내려가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10·17 비상조치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한 김남주는 격노했다. 다음날 오전 광주 동구 산수동에 위치한 이강의 자취방에 김남주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남주는 곡괭이를 집어던지고 광주로 올라왔다.


 그날 두 사람은 역사의 앞날에 대해 밤새 이야기했다. 밤이 이슥한 것도 잊은 채 마음속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정읍행 버스에 탔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은 역사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들이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농민군 첫 전승지 '백산'에 오른 이강은 "이렇게 낮은 봉우리가 혁명군 첫 전승지"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김남주는 황토재 벌판을 지키고 있는 '동학혁명기념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훗날 그가 발표하게 되는 시 '죽창가'는 이날 그 생명력을 얻었을 것이다. "이 들판은 날아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그날 밤, 두 사람은 유신독재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 방법론으로 유신독재 규탄을 골자로 '함성지'라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광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지를 돌며 인쇄용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프린터로 간단히 인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등사기'를 통한 작업이 필요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장소에서 원지를 긁은 줄판을 밀어야 했고, 100여 장을 복사하고 나면 새롭게 글을 적어야 했다. 500장을 복사하려면 원고 5부가 필요한 셈이다. 이강은 등사기용 줄판을 구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활동가 박석무(당시 북성중 교사)를 찾아가 "중고생 학습지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며 줄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박석무는 "혹여나 유인물을 제작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박석무는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으며, 1년 전인 1971년에는 '녹두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결국 이강은 양동시장에서 줄판을 구매하였고 '함성지' 인쇄를 시작했다. 글의 초안은 김남주가 대부분 작성했고 이강도 글을 보탰다. 인쇄비용 마련을 위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니 김남주의 영문과 동기 이경순과 강희순이 차고 있던 반지까지 빼서 힘을 주었다. 이경순은 훗날 전남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2016년 정년을 맞이했다. '함성지' 인쇄에는 이강의 자취방에 함께 살던 여동생 이정과 남동생 이황, 집안 조카 이정호도 함께 했다. 필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전남대 학생인 이강과 김남주의 필체로 인쇄하면 시험지 조회를 통해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이강의 여동생 이정은 또 다른 남동생 이연과 함께 5·18을 맞이했으며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에 참여했다. 막내 이윤은 이한열 열사의 친구로 6월 항쟁에 가담했으며, 1987년 대선 당시 구로을 투표함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당대의 사회운동에 매우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이 합류하는 건,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2월 초입, 우여곡절 끝에 '함성지' 인쇄가 완료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눈과 귀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자학과 어두움 속에 허탈에 빠진 언론, 문화인, 청년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아쉽게도 함성지 원문은 남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법원 판결문 일부를 발췌함)


 이강과 김남주는 개학 전날인 12월 9일을 기해 함성지를 일제히 배포했다. 밤 10시경 전남대 농대, 상대, 문리대, 공대에 250여 장의 유인물을 뿌렸다. 이어 광주공고, 광주고, 전남여고, 광주일고까지 고등학교에도 유인물을 배포했다. 남은 유인물을 조선대에 뿌리려 했지만 12시 통금시간 때문에 100여 장을 남긴 채 귀가했다. 다음날, 전남대학교는 물론이고 광주가 발칵 뒤집혔다. 정보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경찰들이 각지에서 유인물을 수거했다. 등교한 이강은 전남대 활동가 김정길을 만났다. 김정길이 은밀한 제스처를 취하며 "오늘 오전에 오다가 주웠다"며 함성지를 꺼내 들었다. 이강은 시치미를 뚝 떼며 "나도 한 장 줄란가?" 물었으나 몇 개 없다며 거절당했다.


 한편, 박석무는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의 부름을 받고 학생처장실에 갔다. 그 자리에는 신원미상의 중앙정보부 요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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