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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25. 2020

5.18 민주화운동 - 10일간의 항쟁 총정리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본 글은 1980년 5·18 민중항쟁의 배경과 열흘 간의 항쟁, 해당 사건이 남긴 피해와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길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2. 1980년 5월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


3.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태동


4. 1980년 5월 14일~ 16일, 민족민주화성회


5.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6. 1980년 5월 18일, 피의 일요일


7. 1980년 5월 19일, 확대되는 시위


8. 1980년 5월 20일, 민주기사들의 차량시위


9.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10. 1980년 5월 22일~ 26일, 해방광주


11. 1980년 5월 23일,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


12. 1980년 5월 24일, 송암동 학살사건


13. 1980년 5월 25일, 고뇌하는 광주


14. 1980년 5월 26일, 죽음의 행진


15. 1980년 5월 27일, 최후의 항전


16. 5.18 민주화운동이 남긴 피해


17. 5.18 기간 중 계엄군의 실탄 사용 현황


18. 5.18 민주화운동의 남은 과제 - 실종자 문제


1.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1980년, 5·18이 우리에게 왔다.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는 일제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분단, 동족상잔 전쟁과 학살을 통해 시민들에게 무력함과 순응을 가르쳐왔다. 전후 30년간 두 사람의 독재자가 국가를 지배했다. 야만의 시대였다.


 박정희는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을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린 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쳤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대외 의존적 성장이었다. 특히 노동자의 임금을 억압함과 동시에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 3권을 원천 봉쇄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을 발표하여 제4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보통 선거를 완전히 폐지하고 체육관 선거를 확립했다.     


 1979년은 박정희 집권 18년 차였다. 그해 중순부터 그간 쌓여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YH무역 사건


 1979년 3월 29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윤을 축적해온 가발회사 YH무역이 폐업을 공고했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노동조합과 함께 회사 측에 맞섰다. 그러나 그해 8월 6일, 사측은 폐업을 확정했다. YH무역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도움을 요청했고, 8월 9일부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8월 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농성을 강제 해산하고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노동조합 집행위원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의원들도 뺨을 맞는 등의 폭행을 당했다.


 분노한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부산 마산 항쟁


 1979년 10월 4일, 여당 의원들이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빌미로 '국회의원 김영삼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10월 13일, 김영삼 의원 제명에 반발하여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10월 15일에는 분노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에 나와 시위를 진행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부산대, 동아대에 이어 마산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을 기점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특전사를 투입했다. 여기에는 불과 7개월 후, 광주를 피로 물들이는 3공수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동자 유치준이 사망했다. 나흘 간의 시위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1,563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는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10.26 사태


 칠흑과 같이 어둡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난데없이 자신의 부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당시 술자리에는 김계원 비서실장도 동석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 사건 최후진술에서 자신이 총을 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날 술자리에서 불과 1주일 전에 발생한 부마항쟁에 대한 대처를 놓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200~300만 명을 죽였는데 여차하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4.19 당시에는 최인규나 곽영주 같은 장관들이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를 명령하면 누가 나를 사형시키겠나”라고 동조하는 것을 듣고 암살을 실행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이어왔던 독재자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다.


 12.12 군사반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날인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계엄 정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0·26 사태 직후 한국 사회의 중앙 권력에는 큰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대통령과 함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주요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에 온전히 권력을 유지하던 군부의 실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두환의 배후에는 ‘하나회’라고 불리는 군내 사조직이 존재했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 이후 기수 출신 군 장교들의 모임이었다. 육사 11기는 1951년 육사에 입학하여 1955년 졸업한 이들로,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 장교들 중 처음으로 4년제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군 장교가 되었다. 이들은 첫 4년제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특유의 엘리트 의식을 형성하였으며, 군내 사조직을 형성하여 군부의 상층부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권력의 공백을 틈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육군본부를 점령했다. 반란 과정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비롯한 군인들이 무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조선대학교 재학 중, 일반 사병으로 군대에 입대했던 정선엽 병장 역시 불과 5개월 뒤 그의 고향을 피로 물들게 하는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정선엽 병장의 사인은 '계엄군과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되었는데, 2022년 3월 25일 오마이뉴스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을 통해 정 병장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보도했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정 병장은 국방부 B-2 벙커 초병 임무 수행 중, 반란군에게 소지하고 있던 M-16 소총을 빼앗기지 않으려 대항하였고, 성명을 알 수 없는 15지역대원들이 목에 발사한 1발과 가슴 부위에 발사된 3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들은 반란 과정에서 휴전선에 주둔하던 병력까지 동원했다.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내 대항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 소속 반란군인들은 가히 창군 이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반란수괴', '내란목적살인', '내란주요임무종사', '상관살해', '초병살해', '불법진퇴' 등 군 형법상 가장 무겁고 엄중한 범죄들이 자행되었다. 이로써 이들 '신군부'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반란수괴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0년 2월 25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8월 5일에는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스스로 별을 두 개나 주워단 셈이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 차근차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민들은 18년간 장기집권을 이어온 독재의 공백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2. 1980년 5월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


 12.12 군사반란 직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서울은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쳤던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시기이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쟁의가 터져 나와 무려 897건에 달하였고, 신규 노동조합들의 깃발이 속속 등장했다.


 1980년 3월, 대학가가 열리자 각 대학에 총학생회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5월 2일,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최대 규모로 진행된 비상학생총회장에 모인 학생들은 ‘유신철폐’, ‘계엄해제’ 등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결의했다. 5월 9일에는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망을 논의했다. 이들은 5월 14일을 기해 일제히 거리로 진출하여 집회를 진행했다. 이때 서울역을 중심으로 이틀에 걸쳐 이어진 시위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하여 민주화 일정 진행을 촉구했다. 5월 15일,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운동가들은 향후 활동에 대해 고심했다. 각 정당들이 5월 20일을 기점으로 임시 국회를 개원하고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합의한 상황이었다. 학생 대표자들은 군부를 더 이상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온건파와 시위를 계속해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뉘어 논쟁을 이어갔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온건파를 대표했고, 서울대학교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이 강경파를 대변했다.


 긴 토론의 결과, 국회가 임시국회를 통해 계엄 해제를 합의했으니 더 이상 군부를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이들은 논쟁 끝에 가두시위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일명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 대표자들은 시위를 중단하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만약 군부가 움직임을 보이면 다음날 아침에 각 대학교 정문에서 만나자..”


3.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태동


 전남대학교는 1970년대 이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었다. 1971년 광주일고 출신들이 전남대에 만든 이념 서클 '민족사회연구소'의 교련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독재에 저항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에는 반(反)유신 시위를 준비하던 전남대학교 재학생 18명이 구속되었다. 이듬해 문교부는 각 대학 총학생회를 폐지하고, 학원병영화 조직인 학도호국단 부활을 발표했다. 1970년대 후반, 전남대 학생사회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박정희 군사교육에 반발하여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날, 이들은 모두 중앙정보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도 양심적인 교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이 끌려갔음에 분노했다. 곧 수백 명의 학생들이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시위를 진행했다. 다음날, 이들은 거리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전남대학교 재학생 14명과 조선대학교 재학생 4명이 구속되었다. 이중 전남대 재학생 10명은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 사건으로 제적생이 된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박기순과 신영일은 소외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노동 야학(夜學)을 만들기로 했고, '들불야학'을 만들었다.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강의실로 활용했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광천동에 위치한 광주공단 노동실태를 알기 위한 실태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때 실태조사반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전남대 재학생들이 참여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법대생 박관현이 합류했고, 전대 학보사 (현 전대신문) 안진 기자는 아예 학보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 이들은 밤낮으로 노동자들을 만나 추합 한 299장의 설문지를 분석했고, 걸출한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상원은 박관현에게 들불야학 합류를 제안했다.


 1980년, 유신 시기에 제적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학기 초부터 군부 독재에 굴종했던 어용교수들에 대한 학내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일부 학생들은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며 학원민주화를 요구했다. 노동 실태를 직시하는 것으로 공부에 회의감을 느꼈던 박관현은 고심 끝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부활에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절친 양강섭을 만나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양강섭은 7월까지만 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이를 수락했다. 부총학생회장으로는 공과대학의 이승룡이 합류했다. 곧 인문대학 정선자 후보를 비롯한 단과대학 러닝메이트도 생겨났다.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402호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방은 선거캠프가 되었다. 선본명은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였다. 박관현은 헝클어진 머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윤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했다. 신뢰감을 주기 위해 양복을 맞추는 것도 도왔다. 그해 4월, 박관현은 60%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박정희에 의해 문을 닫았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한편,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되었던 김운기가 학교로 돌아온 직후부터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그와 함께 반(反)유신 활동을 했던 양희승, 유재도 등이 합류했다. 이들 역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활동에 나섰다. 그해 오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는 함께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4. 1980년 5월 14일~ 16일, 민족민주화성회


 1980년 5월, 광주도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노동조합과 총학생회가 결성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민주 일정 속행’을 주장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14일을 기해 전남대 정문을 넘어 거리로 진출,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양심적 교수들도 함께였다. 이날 이들은 전남도청까지 행진다. 일명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는 사건이다. 학생들의 평화적인 행진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했다. 다음날인 5월 15일에도 행진이 이어졌다. 이때 광주 지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로케트건전지 노동조합을 결성한 여성노동자 1,800명은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개최한 후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서 빵과 우유를 전달했다. 도청에 도착한 학생들은 마이크를 잡고 집회를 이어갔다. 집회의 사회는 전남대 총학생회 양강섭 총무부장이 맡았다. 그의 소개를 받고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수많은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는 이 나라에! 인간 노릇을 못하고 노예와 같이 굴종 거리며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 이제는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최선을 그르칠 수 없어서 다 같이 동참하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의 연설은 여전히 많은 광주시민들에게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다. 1980년 5월 15일, 전남대 총학생회는 시위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직후,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시위 잠정 중단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광주 지역 학생들은 이대로 시위를 끝낼 수 없었다. 이들은 고심 끝에 다음날인 5월 16일에도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지난 이틀간 있었던 시위보다 더 파격적인 '야간 횃불집회'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기로 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전라남도 경찰의 총책임자였던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을 만나 야간 횃불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1980년 5월 16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횃불시위를 진행했다. 광주 경찰들이 이들의 집회를 보호했다. 불과 이틀 후부터 광주가 겪게 될 참극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5·16 화형식'을 진행했다. 마지막 집회가 횃불집회로 진행된 것은, 밤하늘을 밝히는 횃불과 같이 명명백백하게 나아갈 길을 밝히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날의 횃불집회를 끝으로 3일 간 이어진 민족민주화성회는 막을 내렸다.


5.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많은 시민들의 바람과 달리 신군부는 끝내 민중들의 저항을 짓밟고 권력을 찬탈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했다. 신군부 측 인사들은 박정희 사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어 있던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의견은 묵살되었다. 이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중앙청 국무회의장을 포위한 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프라하의 봄처럼 짧게 끝났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95개 대학에 특전사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신군부는 허황된 ‘新남침설’ 등을 주장해 왔으나 군대는 그들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곳들을 향했다. 5월 17일 저녁 무렵이 되자 군부는 미리 점찍어둔 민주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최종적으로 2,699명의 민주 인사를 체포했다.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과 이해찬, 유시민, 심재철, 문재인, 김상윤, 정동년 등 민주주의와 관련된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은 모두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군부는 이화여대에 모여있던 전국 총학생회 대표단 회의장에도 난입했다.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빠르게 전국 각지에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알렸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에도 “군인들이 회의장에 왔다 너희도 어서 피하라”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광주 계림동 대지호텔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대책을 고심했다. 1970년대 광주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 윤한봉은 문병란 시인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상윤은 녹두서점에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박형선, 정동년과 같은 옛 전남대 학생운동 주동자들도 속속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5월 18일 새벽 1시경 박관현은 총학생회실에 남은 인원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양강섭 총무부장을 전남대로 보냈다. 그러나 양강섭이 총학생회장실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 33대대였다. 총학생회실에 남아있던 인원들은 서둘러 두 갈래 길로 피신을 시도했다. 양강섭 총무부장 등 3명은 중앙도서관을 거쳐 상과대학 쪽으로 피신했다. 이승룡 부총학생회장, 권창수, 오진수 등 4명은 공대 쪽문을 거쳐 피신하고자 했으나, 퇴로가 막혀 공대 5호관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3시,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남대에 왔다. 군인들은 이미 학교를 점령한 후 도서관 등에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끌어내 기합을 주고 있었다. 이들은 학생들을 마구 폭행했다. 학교 수위가 박관현에게 도망치라고 눈치를 주었다. 남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수 돌산도까지 피신했다. 불과 몇 시간 후 '5.18'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었다.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양희승, 김운기, 유재도, 유소영 등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로써 광주 지역 사회운동가들은 대부분 검거되거나, 몸을 숨겨야 했다. 광주에는 시위를 주동할만한 사람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불과 몇 시간 후에 일어나는 시위는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6. 1980년 5월 18일, 피의 일요일


 1980년 5월 18일 새벽, 특전사가 광주에 왔다. 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학교를 35대대는 조선대학교를 점령했다. 이들은 착검한 M-16 소총과 곤봉을 들고 학교 건물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다짜고짜 구타하기 시작했다. 곧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온 학생 60여 명이 기합을 받기 시작했다. 특전사 군인들의 폭력의 정도는 전북대학교 재학생 이세종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월 18일 새벽, 착검한 M-16 소총과 곤봉을 들고 전북대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고, 간부들을 피신시키려 했던 이세종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생명에 잃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 추락사’로 은폐되었으나, 훗날 온몸에서 발견된 타박상을 근거로 그 진상이 밝혀졌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전남대학교 정문을 사이에 두고 군인들과 학생들의 대치가 시작됐다. 군부는 민주인사들을 체포함에 따라 시민들이 침묵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오히려 평범한 시민들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여들기 시작한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군인들에게 항의하며 자연스레 '비상계엄 해제', '민주 일정 진행'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완전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했다. 투석전이 벌어졌지만,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30분, 분노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를 벗어나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거리까지 행진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 학생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은 광주 시내에 해당하는 금남로 한복판이었다. 곧 완전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금남로에 도착했고, 곤봉을 들고 차량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기 시작했다. 군인이 철심이 박힌 곤봉을 휘두르면, 맞은 사람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이들은 젊은 사람만 보면 곤봉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했다. 보다 못해 이에 항의한 노인도 계엄군의 곤봉에 쓰러졌다. 금남로 거리는 삽시간에 피의 바다가 되었다.



 1980년, 광주 가톨릭센터 6층에는 대주교의 집무실이 있었다. 당시 광주 가톨릭의 지도자였던 윤공희 대주교, 조비오 신부, 김성용 신부는 창문을 통해 계엄군이 학생들을 때리는 장면을 지켜봤다. "젊은 학생들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있는데, 내려가서 도와줄 용기가 없어 부끄러웠다", "총이 있었다면 나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훗날 그들이 남긴 증언이다. 거리의 참상을 목도한 가톨릭 사제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했다.


 이날 군부는 시위 진압 명분으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왔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금남로에 왔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의 죽음은 계엄군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증언하고 있다. 5월 18일, 금남로에 나와있던 김경철은 계엄군의 폭행에 의해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당시 계엄군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을 보는 즉시 곤봉을 휘둘렀다. 김경철은 폭행하는 계엄군에게 자신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손짓했지만, 계엄군은 심한 욕을 하며 더욱 세차게 곤봉을 휘둘렀다. 결국 다음날 새벽 3시경, 김경철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첫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그에게는 갓 돌을 넘긴 딸이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이날 하루 동안 68명의 시민들이 두부외상, 타박상, 대검에 의한 자상 등을 얻었으며 12명은 중상을 입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학생들이 군인들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7. 1980년 5월 19일, 확대되는 시위


 1980년 5월 19일, 학생시위는 민중항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전날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은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고 외치며 거리로 모여들었다. 군인들은 모여든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고 체포했다. 이들은 시위 참여자들을 옷을 벗긴 상태에서 폭행했고, 심지어는 대검으로 찔렀다. 어떤 군인이 다친 학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택시에 태우던 택시기사를 대검으로 찌른 일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날 공수부대는 최초의 발포를 했다.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 인근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당하자, 한 장교가 M-16 소총을 발포했고 광주고 3학년 김영찬이 총상을 입었다.


 계엄군은 광주 시민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던 YWCA에도 난입했다. 이들은 무장한 상태로 YWCA에 들어왔다. 당시 YWCA는 신용협동조합, 양서협동조합, 국제앰네스티 광주본부 등이 함께 사무공간으로 사용하는 등 광주 시민사회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9일 12시경, YWCA 금남로 사무실에는 들불야학 강학이기도 했던 김영철, 박용준과 양서협동조합 황일봉이 있었다. YWCA에 난입한 군인들은 황일봉을 끌어내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학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YWCA 건너편에 있던 무등고시학원 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려도 되는가" 군인들의 야만에 분노한 학생들은 창틀을 잡고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즉시 무등고시학원으로 달려왔다. 학원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폭행했다. 밖에 있던 군인들은 학원 건물 셔터를 기어서만 나올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렸다. 학생들은 곤봉을 피해 학원을 기어서 빠져나왔고, 군인들은 그들이 학원을 나오는 즉시 곤봉으로 폭행했다.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폭행하는 광경을 지켜본 고등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 대동고에는 1964년 6.3 항쟁을 주도했던 1세대 전남대 학생운동가 박석무가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박석무는 윤한봉의 둘째형이자 대동고 동료 교사였던 윤광장, 마찬가지로 대동고 동료 교사인 박행삼 등과 함께 교사모임을 만들어 활동 중이었다. 여기에는 중앙여고, 전남고, 광주여상 교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5월 19일, 박행삼은 단단히 각오하고 수업에 임했다.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출석부터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 어떤 말도 해서는 안되고, 들어서도 안되었다. 그때 한 학생이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지금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는데 수업을 꼭 하셔야만 하겠까?" 학생의 질문에 박행삼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고,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다. 곧 대동고 학생들은 학내 시위를 시작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교실을 뛰쳐나와 운동장에 모였다. 학내에 구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박행삼과 윤광장은 이들을 만류했다. 두 사람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호소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만류하는 광경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한편, 그날 광주일고와 중앙여고 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에서 집회를 진행다. 중앙여고는 1975년 '겨울공화국'이라는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직된 양성우 교사의 학교였다. 학내 시위 소식을 접한 전남도교육청은 즉시 광주 소재 초, 중, 고등학교 임시휴교를 발표했다. 고등학생들은 학내 시위를 마친 후 삼삼오오 금남로로 이동하여 시위에 합류했다. 계엄군은 광주일고 앞에 위치하던 광주공과기술학원에 난입하여 40여 명의 학생 및 강사들을 옷을 벗긴 상태로 폭행다.


 오후 5시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평범한 시민 김안부는 광주공원 근처에 위치하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그는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만복에 의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전날 군인들의 곤봉에 맞고 쓰러진 후 19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난 김경철에 이어,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1980년 5월 19일, 김경철, 김안부 두 사람의 광주시민이 국가의 군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사람은 군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자상을 입었다.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군인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가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5월 19일 밤, 육군본부는 시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3공수여단을 광주로 증편했다.


8. 1980년 5월 20일, 민주기사들의 차량시위


 1980년 5월 20일. 더 많은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전사 군인들은 곳곳에서 곤봉과 대검과 M-16 소총으로 잔인한 살인 행위를 이어나갔다. 시민들은 무장한 특수부대 군인들의 폭력 앞에 무력했다. 전날 택시기사가 대검에 찔리는 등의 일이 일어나자, 광주 지역 운송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리들이 차를 끌고 와서 방패가 되어주자"며 자동차를 끌고 모이자고 약속했다. 오후 6시, 버스와 택시 200대가 차량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계엄군의 폭력을 비토 하듯, 무등경기장에서 도청까지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차량들과 함께 걸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5월 20일은 현재 '민주기사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한편, 광주의 저항이 심상치 않자, 언론에도 광주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진실을 외면한 언론들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등의 왜곡보도를 자행했다. 왜곡보도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를 불태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계엄군이 광주 MBC에서 철수한 직후 불이 났다는 증언이 있어 계엄군이 시민들의 폭력성을 부각하기 위해 방화를 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훗날 광주 MBC는 “5.18 왜곡보도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날, 계엄군의 학살에 대해 보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반성의 내용을 담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 일동"


 1980년 5월 20일 밤, 시민들은 광주 전역에서 시위를 진행했다. 광주역 앞에서도 시민들의 시위가 진행되었다. 오후 11시경,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0명의 시민이 총에 맞았고, 4명이 사망했다. 당시 군인들은 광주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광주의 저항이 심상치 않자 공수특전여단으로도 모자라 양평의 20사단을 광주역으로 급파했기 때문이다. 20사단은 이동 도중 광주역이 아닌 송정역으로 도착지를 변경했지만, 군인들의 발포는 20사단의 광주역 진주에 있어 시민들의 시위가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날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발포는 5월 19일에 있었던 군 장교의 우발적인 발포와 달리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이었다. 그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향한 발포를 주저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20일, 대한민국 역사는 시민들을 향한 국가권력의 발포를 4.19 혁명 이래 20년 만에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9.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1980년 5월 21일, 군인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도청 앞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날 밤, 광주역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두 사람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왔다.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부 시민들이 호소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사령부는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를 보십시오. 광주시민이 군인이 쏜 총에 의해 죽었습니다!”


 곧 시민들이 금남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때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민대표를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옥주, 김범태 등 4명이 대표로 선발되었고 이들은 도청에 들어가서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면담했다. 시민대표들은 계엄군 철수, 연행자 석방 등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도지사는 전옥주에게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켜 주면 잠시 뒤에 밖으로 나가서 위로의 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을 한참 넘기고도 도지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날, 전남도청 앞에는 기록상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여있었다. 곧 계엄군에게 실탄이 교부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한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 11공수여단이 발포를 시작했다. 이때 전남도청 스피커에서는 오후 1시에 맞추어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들의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10분간 지속되었다. 조준경을 교부받은 저격수들은 건물 옥상에서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1980년 5월 21일 100명이 넘는 광주시민이 총에 맞았다.



 1980년 5월 21일, 이날 정확히 몇 명의 시민이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명백한 것은, 이들의 행위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분노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직후 즉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탄약을 확보했지만, 교전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계엄군은 5월 21일 오후 5시 30분을 기점으로 전남도청에서 철수했으며, 광주 외곽지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을 감추기 위해 광주를 철저히 봉쇄했습니다. 그 누구도 광주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광주를 빠져나올 수 없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이 되었다.


10. 1980년 5월 22일~ 26일, 해방광주


 철저히 고립된 외로운 섬 광주. 계엄군은 총을 손에 쥔 시민들이 ‘극렬한 폭도’의 행위를 할 것을 원했다. 그러나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을 사건들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도시를 청소했고 서로를 위로하며 음식을 나누었으며, 자발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광주에 45개의 은행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은행을 털지 않았다. 시민들은 오히려 다친 이들을 위해 줄지어 헌혈을 했다. ‘해방광주’라고 불리는 시기다. 5·18의 위대함은 시민들이 억압에 대한 저항을 넘어,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했음에 있다.



 해방광주의 시민들은 매일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한차례씩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5월 26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해 나갈 것인지, 지혜를 모았다. 기록에 의하면 연인원 7만 명 이상의 광주시민들이 매일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주로 전남대 학생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던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당시에는 프린터가 없었기 때문에 등사기를 이용해서 유인물을 제작했다. 등사기 특성상 100장을 인쇄하면, 원본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윤상원과 전용호가 글을 썼고, 박용준이 예쁜 글씨로 같은 내용의 글을 여러 차례 적었다. 처음에는 들불야학이 위치하던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했는데, 5월 25일부터는 YWCA에서 더 좋은 인쇄기구를 사용했다. 전옥주, 차명숙, 박영순 등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트럭을 타고 다니며 광주의 상황에 대한 방송을 진행했다.


투사회보 5, 6호


 5월 22일, 광주지역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계엄사 측에 사망자 명예회복 등을 비롯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무기 회수를 진행했다. 시민군은 결성 하루 만에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행보에 불만을 제기했다. 5월 22일, 계엄사령부를 방문한 시민수습위 인사들이 궐기대회에 참여했다. 마이크를 잡은 장휴동 (태평극장 사장) 수습위원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결집한 시민들을 향해 “여러분 지금 당장 총기를 모두 반납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엄사에 치안을 맡겨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에 많은 시민들이 야유를 보냈다. 이미 군인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시민들이었다. 5.18에 참여해왔던 조선대학교 재학생 김종배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빼앗았다. 그는 5.18 이전까지 민주화 관련 시위에 참여해본 경험조차 없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단순한 수습과 상황 종결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곧 이에 동조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일빌딩과 YMCA 옥상에 있던 시민들은 하늘로 공포탄을 발사하며 김종배의 발언에 동의를 표했다.


 김종배는 이를 통해 5.18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전남도청 앞 남도회관에 모여있던 대학생들과 함께 사태 해결에 대해 논의했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김창길이 “이번 일은 대학생이 시작했으니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5월 22일 오후 4시 전남도청 1층 서무과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학생수습위는 김창길 위원장, 김종배 부위원장, 정해민 총무, 양원식 대변인, 허규정 무기수거반, 명노근, 송기숙 고문 (전남대 교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시민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는 계엄사와의 협상을 통해 사망한 시민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폭도 누명을 없앨 것, 더 이상의 법적 처벌을 진행하지 말 것, 계엄군의 폭력에 대해 사과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무장해제만을 요구하며 막무가내로 일관했다.

 5월 23일,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때의 궐기대회는 사실상 계엄사와의 협상 결과에 대한 보고대회로 진행되었던 전날과 달리, 나름의 격식을 갖춘 집회였다.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계층 대표자 발언, 모금 등이 이루어졌다. 들불야학 강학 김영철이 노동자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고, 극단 '광대'의 김태종이 사회자를 맡았다. 극단 '광대'는 1980년 1월에 창립되었으며, 박효선, 유선규, 김선출을 비롯한 전남대 활동가들이 마당극을 만들어 공연을 진행하던 문화운동 그룹이었다. 이날 집회에서 김태종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외쳤고, 김영철은 노동자 대표답게 광주공단 노동자들도 함께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시민대표로는 훗날 5.18을 다룬 소설 '깃발'을 창작하는 홍희담 작가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고, 많은 시민들이 열광했다.


5.18 직후 배포된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 김태종(5.18 사회자), 윤한봉 수배 전단

 이날 집회는 윤상원, 이양현, 정상용, 박효선, 김태종 등이 녹두서점에 모여 기획한 집회였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광주 학생운동가들이었다. 예비검속 된 녹두서점의 주인장 김상윤의 동생 김상집이 전남대 스쿨버스를 열쇠 없이 시동을 걸어 광주를 누비며 집회를 홍보했다. 윤상원은 학생수습대책위원장 김창길을 만나 집회 진행에 대해 논의했다. 많은 동료들이 잡혀갔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남은 활동가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11. 1980년 5월 23일,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사건


 1980년 5월 23일 정오, 한 대의 버스가 광주 외곽에 해당하는 화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버스에는 18명의 시민이 타고 있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후, 그의 눈앞에 세상을 떠난 시민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던 것인지, 상무관에 모여있던 시신들의 장례를 돕던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일신방직 노동자였으나 공장이 난리통에 문을 닫자 본가가 있는 화순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탄 고영자와 김춘례, 시신들을 안치할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던 백대환, 황호걸 등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는 주남마을 인근에서 특전사 군인들과 조우했다. 군인들은 그 누구도 광주를 빠져나가거나, 광주에 들어갈 수 없도록 외곽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은 버스 탑승객들이 광주를 빠져나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다짜고짜 미니버스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버스 내부에서 흰 옷을 흔들며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도 총격은 잦아들지 않았다. 발포는 버스기사가 사망하고, 버스가 고랑에 빠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날 해당 버스 탑승자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M-16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와 가슴과 하복부에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이 여러 발의 M-16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군인들은 버스에 올라탄 후 쓰러져있는 사람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검으로 시신들을 찔러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박현숙과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자창이 발견되었다.


 군인들은 확인사살 후 생존해있던 시민 3명을 부대 주둔지로 끌고 갔다. 그러나 상급자로부터 "귀찮게 왜 데리고 왔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군인들은 중상자 2명을 야산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두 사람을 권총으로 살해한 후 가매장했다. 손에 작은 부상을 입었던 단 한 사람만이 해당 버스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당 사건 이외에도 군인들에 의한 버스 학살사건이 더 있었다고 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씨는 한 군인으로부터 "오늘 오전에도 다른 버스에 탄 11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군인은 그 이야기를 하며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생존자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버스 학살사건의 진상은 생존자가 없어서 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은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하여 이 모든 사실을 증언했다.


 "저희들이 차에서 살려달라고, 여학생들이 몇 명 있었거든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는데도 계속 총알이 날아오고. 버스에 탄 군인들이 대검을 들이대면서 너도 유방 하나 잘리고 싶냐 그러더라고요"


 그의 증언이다. 그러나 같은 날 청문회에 출석한 현장지휘관은 "폭도들이 총격을 하며 돌격해와서 발포했다"고 답변했다.


 1988년 5공 청문회.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한 야당 의원들이 물고문에 의해 살해된 박종철이 죽어간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작은 욕조의 용도가 무엇이냐? 묻자, "조사를 받다가 땀을 흘리면 더울까 봐 준비했다"고 답변했던 양심 없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현재 주남마을에는 미니버스 총격사건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2. 1980년 5월 24일, 송암동 학살사건


 1980년 5월 24일, 특전사 11공수여단은 기존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곧 진군을 시작했다. 잠시 후 이동 중이던 11공수여단 선두는 광주 남구 효덕동을 지나던 중 시위대를 발견하고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선두 병력을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11공수여단 본대는 총소리를 듣고 주변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평범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 뒷산에서 놀고 있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와 친구들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달아났다. 전재수는 그 과정에서 고무신이 벗겨져 뒤를 돌아봤다. 그는 그 순간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가슴을 맞고 사망했다. 진월동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전남중학교 1학년 방광범도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효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총상을 입었다. 군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자 민간인 학살이었다. 



 초등학생 전재수는 1969년 생으로, 생존했다면 2021년 기준 한국 나이 53세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개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5월 광주에는 전재수보다 어린 희생자들도 있었다. 최연소 희생자는 가족들과 함께 실종된 후 사망자로 인정받은 2살 어린이다. 5월 27일에 총상을 입은 채 시신으로 발견된 4살 아이는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한 채, 5·18 묘역에 묻혀 있다.


 상황을 정리한 11공수여단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불과 몇 시간 후, 광주 남구 송암동 인근을 이동하던 중 기습공격을 받았다. 갑자기 크레모아가 터졌고, 수류탄이 날아왔다. 11공수여단은 즉시 기습 주체를 향해 응사했다. 전투는 30분간 이어졌다. 11공수여단은 발포 원점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11공수여단을 공격한 건 같은 계엄군인 전투교육사령부 산하 교도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즉 계엄군 간 오인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의 전투로 10명의 사망자 (11공수여단 9명, 교도대 1명)와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김평용 (살레시오고 2학년)과 박연옥은 거리를 지나던 중, 이들의 교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김평용은 도망치던 중에 M-16 총탄에 맞았다. 박연옥은 총성을 듣고 하수구에 숨었다. 군인 한 명이 그에게 나오라고 지시했지만, 너무 무서워 나가지 못했다. 군인은 하수구에 총을 난사했다.


 5.18 기간 동안 사망한 군인은 모두 23명이다. 혹자는 이들이 시민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오해하며 5.18에 다른 면모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일각에서는 '23명'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5.18을 폄훼한다. 그러나 5.18 당시 군인 사망자 23명 중 15명은 시민들과 무관한 사건으로 사망했다. 15명 중 14명은 3차례에 걸쳐 발생한 '군인 간 오인 교전'으로 사망했으며, 1명은 오발사고로 사망했다. 군인 간 오인 교전이 빈번했음은, 당시 반란군인들에 의한 지휘체계 이원화와 군 기강 문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질적으로 시민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은 많게 잡아야 8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5.18 당시 시민 피해는 사망자 166명, 실종자 242명 (이중 75명 사망 인정), 부상 후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구속자 1,589명 등 사상자만 5,000명이 넘는 규모다. 광주 시민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향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에 분노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러나 해당 총기는 사용되지도 않았고, 광주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1980년 5월, 아이러니하게도, 계엄군을 학살한 것 역시 계엄군이었다.


 이날 군인 간 오인 교전으로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11공수여단 군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교도대 병력에게 보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송암동의 민간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미 두 부대의 교전 과정에서 주변 민가에 있던 시민 5명이 총상 등의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방해가 되었는지, 11공수여단 군인들은 근처 농가에 있던 칠면조 200여 마리와 젖소를 향해서도 발포했다. 그럼에도 11공수여단 군인들은 주변 민가에 침입하여 분풀이 대상을 찾았다. 마을 젊은이 김승후, 권근립, 임병철 세 사람이 끌려 나왔다. 세 사람 모두 시위는 물론이고, 총격전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임병철과 권근립은 집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11공수여단 군인들은 이들을 근처 하수도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권근립의 어머니는 아들이 끌려가서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후 3시경 11공수여단은 차량 통행자들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김종철과 송정교를 살해했다. 11공수여단은 두 사람의 시신을 근처에 파묻었다. 이들의 시신은 5·18이 끝난 이후에야 발굴되었다. 김종철은 곤봉에 맞아 죽었고, 송정교는 딸과 함께 나주로 빠져나가던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80년 5월 24일, 이날 광주 남구에서 9명의 무고한 시민이 군인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계엄군의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인 발포와 학살은 인류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는 범죄행위였다. 우리는 1980년 5월 24일을 기억해야 한다.


13. 1980년 5월 25일, 고뇌하는 광주


 1980년 5월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금남로에서 열렸다. 기록상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전두환 화형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10만 시민의 의지와 달리,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주도하던 인물들은 궐기대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심지어 집회를 진행할 때 도청의 전기를 끌어다 쓰지 말라며, 전기를 끊는 비겁한 행동까지 했다. 위원회에는 명노근, 조비오와 같은 재야인사들보다 지배질서를 내면화한 친정부 인사들이 더 많았다. 김성용 신부는 모 수습위원이 계엄 당국과의 전화통화에서 "무기 회수를 한다고는 하지만 군인들이 빨리 들어와서 수습하는 게 낫겠다"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월 24일 밤 9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위원장 김창길은 무기반납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미 무기반납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김창길은 무기 수습 후 도청을 비우고 나간 후 '만세' 삼창을 하고 위원회를 해산하자고 주장했다. 시민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일부 인사들의 활동 기저에는 '투항주의'가 짙게 깔려있었다. 이에 학생수습위원 김종배와 박남선이 거세게 반발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격정에 치달았다. "이대로 도청을 내어주는 건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격노한 박남선이 의자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김창길 위원장은 일방적으로 무기반납 입장을 밀어붙였다. 몇몇 학생수습위원들은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하고 도청을 빠져나갔다.


 5월 25일 오전 10시, YWCA에서 시민사회 인사들의 회의가 열렸다. 광주 지역 민주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전남대 명노근, 송기숙 교수, YWCA 조아라 회장, 이애신 총무, 대동고 교사 박석무, 윤광장, 변호사 홍남순, 이기홍, YMCA 이성학 장로, 청년활동가 윤상원, 정상용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윤상원과 정상용은 무기 회수를 중단하고 도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재야인사들은 오후 2시에 남동성당에서 다시 한번 회동을 가졌다. 시민수습대책위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조비오 신부가 민주인사들에게 대책위에 합류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로써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은 5월 25일을 기점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대거 합류했다. 곧 수습위원 25명 명의로 정부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5월 25일 오후 3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집계된 사상자 숫자가 시민들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집계된 사상자는 사망자 70명, 중상자 520명, 부상자 2,170명으로 3천여 명이었다. 사망자들의 시신은 전남도청 앞 체육관인 '상무관'에 안치되었다. 그 시각, YWCA를 중심으로 투사회보를 발행해왔던 활동가들이 도청 내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 박남선과 김종배를 차례로 만났다. 윤상원은 두 사람에게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를 꾸리자고 제안했다. 이어 1970년대 이래 전남대학교와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던 사회운동가 정상용, 윤강옥, 박효선, 김영철, 정해직, 이양현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다.


 1971년, 전남대학교에 막 입학한 광주일고 이념서클 '광랑' 멤버들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71학번 정상용과 이양현은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당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윤한봉이 등장했고, 김상윤도 녹두서점에서 윤상원, 윤강옥, 이양현 등과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공부를 했다. 먼저 간 박기순은 들불야학을 세상에 남겼다. 박효선, 김영철, 윤상원이 그곳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는 마침내 1980년 5월 25일, 전남도청으로 흘러들었다.


 이들은 전남도청 2층 식산국장실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길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달려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도청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조직되어 있던 활동가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결국 김창길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 활동가들이 새로운 도청항쟁 지도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식산국장실에서 빠르게 역할을 나누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민주투쟁위원회로 재편되는 순간이었다.


위원장 - 김종배

부위원장 (내무) - 허규정

부위원장 (외무) - 정상용 (전남대 학생운동)

대변인 - 윤상원 (들불야학 강학)

상황실장 - 박남선

기획실장 - 김영철 (들불야학 강학)

기획위원 - 이양현 (노동운동)

기획위원 - 윤강옥 (전남대 학생운동)

홍보부장 - 박효선 (들불야학 강학)

민원실장 - 정해직

조사부장 - 김준봉

보급부장 - 구성주


 1980년 5월 25일, 외로운 밤이었다.


14. 1980년 5월 26일, 죽음의 행진


 1980년 5월 25일,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민주투쟁위원회로 거듭났다. 사실상 도청항쟁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상황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김종배 위원장은 그저 고독한 밤이었음을, 회고한다. 불과 몇 시간 후인 5월 26일 새벽 4시,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당시 광주 외곽지대에 해당하는 농성역 광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급보가 들어온 것이다. 도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던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조비오 신부, YMCA 이영생 총무, 김천배 이사, 이성학 장로, 대동고 윤영규 교사 등 수습위에 합류한 광주 시민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급하게 대책이 논의되었다. 김성용 신부가 맨몸으로라도 탱크를 막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곧 수습위원 17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도청 정문을 시작으로 농성역 광장까지 걸어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들을 따라 점차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YMCA 김천배 이사가 외신기자들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외신기자들은 생생한 영상과 사진을 남겼다. 수습위원들은 농성역 광장에 진출한 계엄군의 탱크를 비무장 상태로 막아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농성역 광장은 당시 광주 외곽지역으로, 시민군과 계엄군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최전방이었다. 도청을 기준으로 농성역보다 더 서쪽에 해당하는 광산구는 전라남도에 속했고, 지금의 상무지구에는 군부대인 상무대가 주둔했다. 5·18 기간 중 계엄군이 인근 민가에 발포하여 무고한 시민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군인들과 수습위원들은 한동안 대치를 이어갔다. 곧 전투교육사령부 김기석 부사령관이 현장에 왔다. 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물려달라고 요청했고, 부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시민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군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전남도청 공격을 대비한 기만책이었다. 농성역으로 진군함으로써 마치 금남로를 거쳐 도청을 공격할 것처럼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불과 24시간 후, 전남도청에 들이닥친 건, 후문을 기습한 3공수여단이었다. 5월 26일 오전 7시, 11명의 수습위원들이 상무대를 방문하여 김기석 부사령관과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부사령관은 수습위원들의 그 어떤 요구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1980년 5월 26일, 오전과 오후, 4,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그러나 이미 군대의 진입이 확실시되던 시점이었다. 누가 오늘 밤 도청에 남을 것인가,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함성은 여전했지만,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후 2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을 것을 결의한 시민들이 기동타격대를 결성했다. 윤석루가 대장을 맡았고 7조로 구성되었다. 오후 5시 민주투쟁위원회 윤상원 대변인이 외신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민주투쟁위원회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피해상황을 전달했다. 윤상원은 마지막으로 "우리는 오늘 패배한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밤이 오고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6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마지막 회의가 도청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말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진통 끝에 다수결로 “무기를 모두 반납하자”고 결정했다. 조아라, 이애신, 윤공희 등의 위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려는 순간 박남선과 윤석루가 권총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지금에 와서 싸움을 멈추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이다.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우리는 매일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함성을 듣지 않았느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계엄사에서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준 것이 무엇이냐?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항복을 한단 말이냐?"


 회의가 이렇게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윤상원이 박남선과 함께 끝까지 싸우기를 결의하고 기동타격대원들을 불러와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남겠다는 말에, 결국 수습위원들은 귀가하였고, 남은 사람들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시민들도 내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동안 무죄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져 가던 모습을 보아왔지만, 도청에 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고민했다. 특히 가족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남겨질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청소년들에게 이야기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곧 밤 12시가 되었다. 1980년 5월 27일이 찾아왔다.

    

 그렇게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 시작되었다.


15. 1980년 5월 27일, 최후의 항전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라 신뢰했다. 시민들은 칼빈소총을 손에 쥐고 각자의 자리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전남도청에 가장 많은 시민들이 남았고, YMCA, YWCA, 전일빌딩에도 시민들이 남았다. 그들 중에는 총을 들고 있지 않던 사람들도 많았다. 늦은 밤, 수습대책위원장이었던 예순넷 이종기 변호사는 집에 가서 목욕을 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편 지난 5월 21일, 노동청 앞에서 한 청년이 붉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가두방송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영순, 5.18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박영순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았다. 그는 전남도청 방송실에 있었다.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이윽고 새벽 3시가 되었다. 방송실에 있던 박영순에게 김종배가 찾아와서 마지막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영향으로 5.18 마지막 방송이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5.18 마지막 방송은 도청 방송실에서 진행되었다. 민방위 훈련 때 쓰는, 동서남북에 각각 설치되어 있던 대형 스피커가 이용되었다. 박영순은 도청 방송실에서 그 유명한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다.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 방송은 30분간 이어졌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에게 마지막 방송의 호소는 극한의 슬픔으로 남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적막하고 고요한 광주, 그 고독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애절한 목소리를 수많은 시민들은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남겨질 가족들 생각에 도청에 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시민들은 슬픔과 부끄러움 때문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시민들은 도청 스피커로 방송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5.18 직후 “한 여성이 트럭을 타고 다니며 밤새 방송했다”, “법원 쪽에서 군인들에게 걸려서 모두 죽었다더라”하는 소문이 광주 전역에 확산되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의 전기를 내렸다. 모든 불이 꺼졌다. 고독하고 적막한 새벽의 광주, 군대는 이미 광주 전역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반란군인들은 광주진입 작전에 20,317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특전사 산하 3, 7, 11공수여단과 함께 20사단과 31사단이 광주 진입에 동원되었다. 잠시 후 3공수여단 선봉대가 도청 후문을 박차고 도청 내부로 진입했다. 전남도청에는 157명의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도청에 진입한 군인들은 가장 먼저 방송실에 왔다. 박영순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즉시 바닥에 엎드렸고, 그 위로 M-16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총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박영순이 “여학생이에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자 군인들은 총을 멈추고 기어 나오라고 지시했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박영순을 때렸다.


 전남도청 2층 민원실에는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윤석루, 이재호 등이 있었다.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은 1970년대 이래 사회운동에 참여해왔다. 윤상원과 이양현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에서 그와 함께 사회이론을 공부했다. 김영철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거주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던 김상윤의 소개로 들불야학에 합류하게 된 후 들불야학 강학으로서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구성원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 새벽, 이양현은 예전에 학습했던 '역사란 무엇인가'를 되새기며 고독한 밤을 버텨내고 있었다. 곧 3공수여단 선봉대가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달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민원실에 M-16 총탄이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곧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3시간, 도청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민 15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시각,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거쳐 YMCA에 진입했다.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과 YWCA에 진입했다. 군인들은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YWCA에는 들불야학 강학이자, 지난 10일간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작성해왔던 박용준이 있었다. 박용준은 군인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진압 작전 직후 환하게 웃고 있는 소준열 전교사령관


 그 새벽,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5월 27일, 시민 59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3공수여단 군인들은 도청에서 체포한 사람들을 분수대 인근에 일렬로 세웠다. 한 군인이 대검이 장착된 M-16을 내밀며 말했다. “어떤 년이 방송했어 옷을 벗겨서 갈가리 찢어 죽여버린다” 박영순은 그 군인의 말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고문과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써, 1980년 5월 18일 이래 10일간 이어진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시민들은 죽음을 예감하고도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이들의 장렬한 항전은 ‘그 도시의 열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5.18 민중항쟁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윤상원의 말처럼, 그들은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았다.


16. 5.18 민주화운동이 남긴 피해


<5.18 민주화운동 공식 피해 통계>

망자 : 166명

사망 인정 실종자 : 76명

접수된 실종신고 : 448건

사망 추정 실종자 : 242명

후유 사망자 : 376명 (자살 39명)

부상자 : 3,139명

부상자 중 장애를 얻게 된 사람 : 2,252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 2,518명


 5.18 민중항쟁은 큰 인명피해와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삼가 먼저 간 임들의 명복을 빕니다.


17. 5.18 기간 중 계엄군의 실탄 사용 현황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에게 51만 발의 실탄 및 무기를 사용했다.


 소화기 : 497,964발, 권총 : 2,754발

 기관총 : 10,759발, 수류탄 : 194개

 40M 유탄 : 60발, 90M 무반동총 : 8발

 기타(신호탄 등) : 889발, 총계 : 512,626발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 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팔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 곱절의 죽음, 수천 곱절의 피였다고 - (소년이 온다 중에서)"


18. 5.18 민주화운동의 남은 과제 - 실종자 문제


 여전히 5.18 당시 인명피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실종자 문제’ 때문이다. 5.18 당시 많은 시민들이 실종되어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민주화 이후 5.18 당시 실종자에 대한 신고가 시작되자 총 448건이 접수되었다. 여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로서는 242명이 실제로 1980년 5월 당시 실종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중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76명을 사망자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5.18 실종자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5.18 직후 이와 관련해서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첫째로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인 주장으로는 5.18 당시 군인들이 각지에 시민들의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5.18 당시 군인들은 살해한 시민들의 시신을 곳곳에 가매장했다. 이로 인해 5.18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 '오월의 노래2'에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라는 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계엄군에 의해 26명이 가매장되었다는 군 기록이 남겨져있는 광주교도소의 경우에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2020년 현재 기록에 없는 유골이 발견되어 조사 중에 있다.


 둘째는 무더운 5월, 광주에 위치한 군 정보기관인 505보안부대 보일러실이 쉴 새 없이 가동되었다는 무서운 목격담이다. 이는 5.18 당시 군부가 너무 많은 사망자 숫자를 은폐하기 위해 다수의 시신들을 소각했다는 주장이다. 2019년 5월 14일, 스스로를 505보안부대 중령급 간부라고 밝힌 허장환씨는 “시신들을 화장 처리하여 유골을 모처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헬기 등 공군 수송기를 통해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는 주장이다. 5.18 직후 살아남은 광주지역 활동가들은 계엄군이 시신을 바다에 버렸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5월 27일 오전, 전남도청을 쉴 새 없이 오가는 헬기를 보며 반대파들을 납치해 가혹하게 살해한 후 시신들을 바다에 유기한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에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9년 들어 39년간 밝혀지지 않고 있던 실종자 문제에 여러 증언과 증거가 쏟아져 나왔다. 그해 4월 경향신문은 군 비밀문건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 광주에서 김해로 ‘시체’가 이송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이 부분만 기록이 삭제되어 있다. 심지어 공군 자료에는 5월 25일 광주~김해 운항에 대해서만 기록이 누락되어 있었다.



 경향신문은 군 사망자는 높임말인 ‘영현’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김해로 ‘시체’를 옮겼다면 광주시민들의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 이송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해당 보도는 5.18 직후 광주시민들의 불길한 예감과 일치되는 주장이다. 2019년 5월 14일, 허장환은 "518 당시 시민들의 시신을 비닐에 싸서 바다에 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의 말의 진위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실종자 문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도시였던 광주에서 수백 명이 한 번에 실종된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1980년, 14살이던 아들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문을 닫지 못하고 살았다. 아들이 돌아올까 봐. 사망신고도 하지 못했기에 신검 통지서가 날아오자 아들이 살아있는 증거인 것처럼 보관했다. 이처럼 지난 세월 동안 가족을 기다렸을 이들에게, 더 늦기 전에,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


 그날로부터 42년, 광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5.18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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