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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25. 2020

5.18 민주화운동이 남긴 피해

여전히 그날은 현재 진행형이다

<5.18 민주화운동 공식 피해 통계>

망자 : 166명

사망 인정 실종자 : 76명

접수된 실종신고 : 448건

사망 추정 실종자 : 242명

후유 사망자 : 376명 (자살 39명)

부상자 : 3,139명

부상자 중 장애를 얻게 된 사람 : 2,252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 2,518명


 5.18 민중항쟁은 큰 인명피해와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삼가 먼저 간 임들의 명복을 빕니다.


5.18 기간 중 계엄군의 실탄 사용 현황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에게 51만 발의 실탄 및 무기를 사용했다.


 소화기 : 497,964발, 권총 : 2,754발

 기관총 : 10,759발, 수류탄 : 194개

 40M 유탄 : 60발, 90M 무반동총 : 8발

 기타(신호탄 등) : 889발, 총계 : 512,626발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 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팔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 곱절의 죽음, 수천 곱절의 피였다고.” (소년이 온다 중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남은 과제 - 실종자 문제


 여전히 5.18 당시 인명피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실종자 문제’ 때문이다. 5.18 당시 많은 시민들이 실종되어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민주화 이후 5.18 당시 실종자에 대한 신고가 시작되자 총 448건이 접수되었다. 여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로서는 242명이 실제로 1980년 5월 당시 실종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중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76명을 사망자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5.18 실종자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5.18 직후 이와 관련해서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첫째로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인 주장으로는 5.18 당시 군인들이 각지에 시민들의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5.18 당시 군인들은 살해한 시민들의 시신을 곳곳에 가매장했다. 이로 인해 5.18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 '오월의 노래2'에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라는 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계엄군에 의해 26명이 가매장되었다는 군 기록이 남겨져있는 광주교도소의 경우에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2020년 현재 기록에 없는 유골이 발견되어 조사 중에 있다.


 둘째는 무더운 5월, 광주에 위치한 군 정보기관인 505보안부대 보일러실이 쉴 새 없이 가동되었다는 무서운 목격담이다. 이는 5.18 당시 군부가 너무 많은 사망자 숫자를 은폐하기 위해 다수의 시신들을 소각했다는 주장이다. 2019년 5월 14일, 스스로를 505보안부대 중령급 간부라고 밝힌 허장환씨는 “시신들을 화장 처리하여 유골을 모처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헬기 등 공군 수송기를 통해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는 주장이다. 5.18 직후 살아남은 광주지역 활동가들은 계엄군이 시신을 바다에 버렸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5월 27일 오전, 전남도청을 쉴 새 없이 오가는 헬기를 보며 반대파들을 납치해 가혹하게 살해한 후 시신들을 바다에 유기한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에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9년 들어 39년간 밝혀지지 않고 있던 실종자 문제에 여러 증언과 증거가 쏟아져 나왔다. 그해 4월 경향신문은 군 비밀문건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 광주에서 김해로 ‘시체’가 이송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이 부분만 기록이 삭제되어 있다. 심지어 공군 자료에는 5월 25일 광주~김해 운항에 대해서만 기록이 누락되어 있었다.   

 경향신문은 군 사망자는 높임말인 ‘영현’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김해로 ‘시체’를 옮겼다면 광주시민들의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 이송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해당 보도는 5.18 직후 광주시민들의 불길한 예감과 일치되는 주장이다. 2019년 5월 14일, 허장환은 "518 당시 시민들의 시신을 비닐에 싸서 바다에 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의 말의 진위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실종자 문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도시였던 광주에서 수백 명이 한 번에 실종된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1980년, 14살이던 아들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문을 닫지 못하고 살았다. 아들이 돌아올까 봐. 사망신고도 하지 못했기에 신검 통지서가 날아오자 아들이 살아있는 증거인 것처럼 보관했다. 이처럼 지난 세월 동안 가족을 기다렸을 이들에게, 더 늦기 전에,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힌다.     

  

 그날로부터 40년, 광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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