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라 신뢰했다. 시민들은 칼빈소총을 손에 쥐고 각자의 자리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전남도청에 가장 많은 시민들이 남았고, YMCA, YWCA, 전일빌딩에도 시민들이 남았다. 그들 중에는 총을 들고 있지 않던 사람들도 많았다. 늦은 밤, 수습대책위원장이었던 예순넷 이종기 변호사는 집에 가서 목욕을 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편 지난 5월 21일, 노동청 앞에서 한 청년이 붉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가두방송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영순, 5.18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여러 사람들 중한 사람이었다. 박영순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았다. 그는 전남도청 방송실에 있었다.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이윽고 새벽 3시가 되었다. 방송실에 있던 박영순에게 김종배가 찾아와서 마지막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영향으로 5.18 마지막 방송이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5.18 마지막 방송은 도청 방송실에서 진행되었다. 민방위 훈련 때 쓰는, 동서남북에 각각 설치되어 있던 대형 스피커가 이용되었다. 박영순은 도청 방송실에서 그 유명한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다.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
마지막 방송은 30분간 이어졌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에게 마지막 방송의 호소는 극한의 슬픔으로 남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적막하고 고요한 광주, 그 고독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애절한 목소리를 수많은 시민들은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남겨질 가족들 생각에 도청에 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시민들은 슬픔과 부끄러움 때문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시민들은 도청 스피커로 방송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5.18 직후 “한 여성이 트럭을 타고 다니며 밤새 방송했다”, “법원 쪽에서 군인들에게 걸려서 모두 죽었다더라”하는 소문이 광주 전역에 확산되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의 전기를 내렸다. 모든 불이 꺼졌다. 고독하고 적막한 새벽의 광주, 군대는 이미 광주 전역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반란군인들은 광주진입 작전에 20,317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특전사 산하 3, 7, 11공수여단과 함께 20사단과 31사단이 광주 진입에 동원되었다. 잠시 후 3공수여단 선봉대가 도청 후문을 박차고 도청 내부로 진입했다. 전남도청에는 157명의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도청에 진입한 군인들은 가장 먼저 방송실에 왔다. 박영순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즉시 바닥에 엎드렸고, 그 위로 M-16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총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박영순이 “여학생이에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자 군인들은 총을 멈추고 기어 나오라고 지시했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박영순을 때렸다.
전남도청 2층 민원실에는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윤석루, 이재호 등이 있었다.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은 1970년대 이래 사회운동에 참여해왔다. 윤상원과 이양현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에서 그와 함께 사회이론을 공부했다. 김영철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거주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던 김상윤의 소개로 들불야학에 합류하게 된 후 들불야학 강학으로서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구성원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 새벽, 이양현은 예전에 학습했던 '역사란 무엇인가'를 되새기며 고독한 밤을 버텨내고 있었다. 곧 3공수여단 선봉대가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달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민원실에 M-16 총탄이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곧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3시간, 도청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민 15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시각,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거쳐 YMCA에 진입했다.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과 YWCA에 진입했다. 군인들은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YWCA에는 들불야학 강학이자, 지난 10일간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작성해왔던 박용준이 있었다. 박용준은 군인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그 새벽,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5월 27일, 시민 59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3공수여단 군인들은 도청에서 체포한 사람들을 분수대 인근에 일렬로 세웠다. 한 군인이 대검이 장착된 M-16을 내밀며 말했다. “어떤 년이 방송했어 옷을 벗겨서 갈가리 찢어 죽여버린다” 박영순은 그 군인의 말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고문과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써, 1980년 5월 18일 이래 10일간 이어진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시민들은 죽음을 예감하고도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이들의 장렬한 항전은 ‘그 도시의 열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5.18 민중항쟁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윤상원의 말처럼, 그들은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