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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21. 2020

1980년 5월 26일, 죽음의 행진

계엄군이 광주를 조여 오고 있었다

 1980년 5월 25일,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민주투쟁위원회로 거듭났다. 사실상 도청항쟁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상황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김종배 위원장은 그저 고독한 밤이었음을, 회고한다. 불과 몇 시간 후인 5월 26일 새벽 4시,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당시 광주 외곽지대에 해당했던 농성역 광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급보가 들어온 것이다. 도청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던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조비오 신부, YMCA 이영생 총무, 김천배 이사, 이성학 장로, 대동고 윤영규 교사 등 수습위에 합류한 광주 시민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급하게 대책이 논의되었다. 김성용 신부가 맨몸으로라도 탱크를 막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곧 수습위원 17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도청 정문을 시작으로 농성역 광장까지 걸어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들을 따라 점차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YMCA 김천배 이사가 외신기자들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외신기자들은 생생한 영상과 사진을 남겼다. 수습위원들은 농성역 광장에 진출한 계엄군의 탱크를 비무장 상태로 막아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농성역 광장은 당시 광주 외곽지역으로, 시민군과 계엄군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최전방이었다. 도청을 기준으로 농성역보다 더 서쪽에 해당하는 광산구는 전라남도에 속했고, 지금의 상무지구에는 군부대인 상무대가 주둔했다. 5·18 기간 중 계엄군이 인근 민가에 발포하여 무고한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군인들과 수습위원들은 한동안 대치를 이어갔다. 곧 전투교육사령부 김기석 부사령관이 현장에 왔다. 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물려달라고 요청했고, 부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시민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군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전남도청 공격을 대비한 기만책이었다. 농성역으로 진군함으로써 마치 금남로를 거쳐 도청을 공격할 것처럼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불과 24시간 후, 전남도청에 들이닥친 건, 후문을 기습한 3공수여단이었다. 5월 26일 오전 7시, 11명의 수습위원들이 상무대를 방문하여 김기석 부사령관과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부사령관은 수습위원들의 그 어떤 요구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1980년 5월 26일, 오전 이날 광주에는 비가 내렸다. 오전과 오후,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4,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그러나 이미 군대의 진입이 확실시되던 시점이었다. 누가 오늘 밤 도청에 남을 것인가,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함성은 여전했지만,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후 2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을 것을 결의한 시민들이 기동타격대를 결성했다. 윤석루가 대장을 맡았고 7조로 구성되었다. 오후 5시 민주투쟁위원회 윤상원 대변인이 외신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민주투쟁위원회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피해상황을 전달했다. 윤상원은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밤이 오고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6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마지막 회의가 도청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말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진통 끝에 다수결로 “무기를 모두 반납하자”고 결정했다. 조아라, 이애신, 윤공희 등의 위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려는 순간 박남선과 윤석루가 권총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지금에 와서 싸움을 멈추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이다.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우리는 매일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함성을 듣지 않았느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계엄사에서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준 것이 무엇이냐?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항복을 한단 말이냐?"


 회의가 이렇게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윤상원이 박남선과 함께 끝까지 싸우기를 결의하고 기동타격대원들을 불러와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남겠다는 말에, 결국 수습위원들은 귀가하였고, 남은 사람들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시민들도 내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동안 무죄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져 가던 모습을 보아왔지만, 도청에 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깊이 고민했다. 특히 가족이 있었던 시민들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남겨질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역사의 증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곧 밤 12시가 되었다. 1980년 5월 27일이 되었다.

    

 그렇게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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