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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17. 2020

1980년 5월 25일, 고뇌하는 광주

도청항쟁지도부의 결성

 1980년 5월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금남로에서 열렸다. 기록상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전두환 화형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10만 시민의 의지와 달리,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주도하던 인물들은 궐기대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집회를 진행할 때 도청의 전기를 끌어다 쓰지 말라며, 전기를 끊는 비겁한 행동까지 했다. 위원회에는 명노근, 조비오와 같은 재야인사들보다 지배질서를 내면화한 친정부 인사들이 더 많았다. 김성용 신부는 모 수습위원이 계엄 당국과의 전화통화에서 "무기 회수를 한다고는 하지만 군인들이 빨리 들어와서 수습하는 게 낫겠다"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월 24일 밤 9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위원장 김창길은 무기반납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미 무기반납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김창길은 무기수습 후 도청을 비우고 나간 후 '만세' 삼창을 하고 위원회를 해산하자고 주장했다. 시민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일부 인사들의 기저에는 '투항주의'가 깔려있었다. 이에 학생수습위원 김종배와 박남선이 거세게 반발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격정에 치달았다. "이대로 도청을 내어주는 건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격노한 박남선은 의자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김창길 위원장은 일방적으로 무기반납 입장을 밀어붙였다. 몇몇 학생수습위원들은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하고 도청을 빠져나갔다. 


 5월 25일 오전 10시, YWCA에서 시민사회 인사들의 회의가 열렸다. 광주 지역 민주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전남대 명노근, 송기숙 교수, YWCA 조아라 회장, 이애신 총무, 대동고 교사 박석무, 윤광장, 변호사 홍남순, 이기홍, YMCA 이성학 장로, 청년활동가 윤상원, 정상용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윤상원과 정상용은 무기 회수를 중단하고 도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재야인사들은 오후 2시에 남동성당에서 다시 한번 회동을 가졌다. 시민수습대책위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조비오 신부가 민주인사들에게 대책위에 합류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로써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은 5월 25일을 기점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대거 합류했다. 곧 수습위원 25명 명의로 정부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5월 25일 오후 3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집계된 사상자 숫자가 시민들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집계된 사상자는 사망자 70명, 중상자 520명, 부상자 2,170명으로 3천여 명이었다. 사망자들의 시신은 전남도청 앞 체육관인 '상무관'에 안치되었다. 그 시각, YWCA를 중심으로 투사회보를 발행해왔던 활동가들이 도청 내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 박남선과 김종배를 차례로 만났다. 윤상원은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를 꾸리자고 제안했다. 이어 1970년대 이래 전남대학교와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던 사회운동가 정상용, 윤강옥, 박효선, 김영철, 정해직, 이양현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다.


 1971년, 전남대학교에 막 입학한 광주일고 이념서클 '광랑' 멤버들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71학번 정상용과 이양현은 학원병영화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당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윤한봉이 등장했고, 김상윤도 녹두서점에서 윤상원, 윤강옥, 이양현 등과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공부를 했다. 먼저 간 박기순은 들불야학을 세상에 남겼다. 박효선, 김영철, 윤상원이 그곳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는 마침내 1980년 5월 25일, 전남도청으로 흘러들었다.


 이들은 전남도청 2층 식산국장실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길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달려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도청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조직되어 있던 활동가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결국 김창길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 활동가들이 새로운 도청항쟁 지도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식산국장실에서 빠르게 역할을 나누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민주투쟁위원회로 재편되었다.


위원장 - 김종배 

부위원장 (내무) - 허규정 

부위원장 (외무) - 정상용 (전남대 학생운동)

대변인 - 윤상원 (들불야학 강학)

상황실장 - 박남선 

기획실장 - 김영철 (들불야학 강학)

기획위원 - 이양현 (노동운동)

기획위원 - 윤강옥 (전남대 학생운동)

홍보부장 - 박효선 (들불야학 강학)

민원실장 - 정해직

조사부장 - 김준봉

보급부장 - 구성주


 1980년 5월 25일, 외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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